#책 #소설 #문학동네 #아니에르노 #단순한열정
아니 에르노 자신의 연애담을 담아낸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나는 글을 쓴다는 행위의 일차적 목적이 독자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이라는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서 작가는 범인을 찾기 위해 모아 놓은 단서를 통해 사건 해결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형사처럼 삶이 던지는 문제에 치열하게 부대끼는 인간이 느끼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글로써 펼쳐 놓는다. 그 펼쳐진 감정들이 글이라는 모자이크 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순간 작가가 써 놓은 글은 작가 스스로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어쩌면 글쓰기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겉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에 감춰진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통해 그 본질에 닿는 작품의 수는 드물지만 나는 그러한 시도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고 그녀의 글쓰기 방식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한 열정]과 [이방인] 그리고 [소망 없는 불행]은 ‘상실’ 앞에 놓인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허구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담아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세 작품 중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출간되었을 당시
문단에서 야기되었던 논쟁은 바로 이 작품을 소설의 범주에 두어야 하는지에 관한 점이었다. 사건 취재 기사를 보는 듯한 [이방인]의 문체는 소설문학의 특징인 허구를 가미한 사실보다는 실제를 다룬 기사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이방인] p21
이 글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엄마의 죽음이 자신이 자행한 살인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부조리한 현실을 담아낸 [이방인]의 도입부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사회는 상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뫼르소를 그 이유로 단죄했고 그는 그러한 부조리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거의 칠 주가 지났다.
나는 장례식 때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너무도
강렬했던 욕망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고 얼빠진 듯
말문이 막혔던 그때 상태로 되돌아가기 전에 작업에 착수했다. >
[소망 없는 불행] p9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들은 페터 한트케는 어머니를 한 편의 글로 써 내려가면서 그동안 이해불가의 영역에 있었던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고통에 애써 눈감으며 외면해왔던 그는 어머니의 상실 이후 한 편의 글로 완성된 어머니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그녀의 삶에 눈을 맞추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에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삶의 본질을 글로 길어 올림으로써 페터 한트케는 전후 독일을 살아내야 했던 그 시대 어머니들의 고통이라는 시대적 공감대에 다가가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와 페터 한트케가 자신의 작품의 시작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작중 인물이 나아가는 방향을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면 아니 에르노는 연애를 시작했던 과거의 자신을 출발점으로 그녀 스스로 그녀 자신을 뒤따르며 그 기록을 글로 적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삶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 [단순한 열정] p66
[그 사람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 [단순한 열정] p17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온통 열정으로 사로잡았던 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관통하는 시간 속을 그저 잠시 살다 가는 불나방”같은 인간을 작가가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의 쓸쓸함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다시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면 또 그런 숙명 따윈 잊고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불태우고 말리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참으로 애달프다.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1942년 출간)의 뫼르소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숙명을 이야기하고 페터 한트케가 [소망 없는 불행]-(1972년 출간)을 통해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없었던 전후 세대
어머니들의 숙명을 그려낸 이후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1991년 출간)을 통해 시간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채 날지도 못하고 벗어날 수 도 없지만 그 숙명의 시간 동안 시시각각 열정을 불태우는 인간사의 애달픔을 그려냈다. 내가 거칠게 비교해 낸 세 명의 작가들 모두 글쓰기의 방식은 다르지만 한꺼번에 휘몰아쳐 흐르는 홍수처럼 개별성을 지니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개별성을 글로써 표출해낸다는 점에서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금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