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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Mar 21. 2022

막국수 이야기

Apr-18

2018.04

나는 막국수가 먹고 싶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면과 양념을 잘 비비고 고명 없이 면만 한 젓가락 집어서 후루룩 먹고 싶다. 그러면 메밀로 된 면들이 입에서 투두둑 끊어질 것이다. 면의 질감을 입에서 느끼는 것이 막국수를 먹는 즐거움이다. 다음에는 연주홍색 무생채를 국수에 얹어 다시 한 젓가락 먹고 싶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씹히는 무생채와 면의 조화도 재밌다. 그러고 나서는 방금 부쳐진 빈대떡을 한 뭉텅이 잘라 간장에 찍어 먹을 것이다. 시원한 면을 먹다가 마주하는 따끈한 빈대떡의 맛도 훌륭하다. 그리고 다시 면을 먹을 것이다. 오롯이 면만 먹고, 오이채와 같이 먹고, 계란 반 개와 함께 먹고 하다 보면 접시는 금세 바닥을 보인다. 그럼 배가 딱 알맞게 찬다. 아, 나는 막국수가 먹고 싶다.


나는 내가 막국수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렸을 적에는 막국수를 강낭콩밥만큼 싫어했었다. 당시에는 막국수가 무미(無味) 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비빔냉면만큼 새콤하거나 물냉면만큼 진하지 않으니까. 강낭콩밥을 좋아하지 않게 된 뒤로는 강낭콩밥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막국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막국수의 고장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명절날에는 많고 많은 음식점들 중에 막국수집만 문을 열었다. 그래서 명절 당일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나의 푸념을 뒤로하고 항상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뾰로통해있는 큰손주를 위해 외할머니께서 수육을 시켜주시고는 했지만, 나는 차라리 다른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매 명절 저녁을 수육과 감자전을 먹으며 보내곤 했다.


그렇게 몇 년간 막국수를 멀리하다가 성인이 된 후 언젠가 먹어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후로 몇 차례 더 먹고 나서 막국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게 끝이다. 미국에서 보낸 첫 학기에 적응을 못하다가 한인타운에서 왠지 모르게 먹어본 막국수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고... 하는 동화적 서사가 전혀 없다. 그냥 아무런 계기 없이 취향이 바뀌게 되었다.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지금은 되려 이 맛있는 것을 과거에 왜 안 좋아했는지가 의문이다. 그 시간 동안 덜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예상해볼 뿐이다.  


그래서 막국수를 먹을 때면 나는 군대에서 싫어하던 선임을 생각하고는 한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싫어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기억 속의 그는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뒤에서는 자기 후임들을 불러 저 사람의 이런저런 행동은 별로인 거 같으니 주의를 주라, 하는 식의 얄미운 사람이었다. 그러고서는 정작 자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비겁함이 참 싫었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미워했던 그 사람도 전역을 앞두어 말년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점호 시간이 되어 그를 오랜만에 보았는데,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감정이 달라져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았던 몇 주 동안 나는 그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항상 친한 후임들에게 선임 대접을 받다가 이제 쓸쓸히 홀로 앉아있는 그가 갑작스레 초라하고 애잔해 보였다. 내가 이 사람을 왜 그리도 싫어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저 흘려보냈으면 되었던 것을... 감정이란 참 덧없구나! 그때 이후로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지게 된 막국수를 먹으면 미웠다가도 별 이유 없이 무감각해진 사람 생각이 난다. 그렇게 나는 막국수 한 그릇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다. 나무아미타불. 


굳이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막국수는 훌륭한 음식이다. 막국수는 손님을 차별하지 않는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고, 자극적이지 않아 어르신들도 좋아하신다.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훌륭하다. 그리고 식사 후에 속이 편한 게 요즘은 그렇게 좋다. 레디메이드 된 미지근한 스크램블드 에그와 라자냐를 먹고 속이 텁텁해한지도 벌써 세 달이 되었다. 이번 겨울, 출국하기 전 마지막 식사였던 막국수의 편안함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5월에 먹을 야들야들한 수육과 시원한 막국수로 4개월의 수미상관을 짓고 싶다. 아, 나는 빨리 막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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