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입동"의 채소, 생강

by 헤아림




입동

양력 11월 7일쯤, 김장을 포함한 겨울 채비를 시작하는 때

양파 아주심기, 한지형 마늘 파종하기, 가을배추와 무 냉해 입기 전 수확하기




몇 해 전 어느 날, 엄마가 생강 씨앗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자고 했다. 농사를 거들기 전부터도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해 종종 따라다니고는 했다. 시장에 종묘상이 있으니 당연히 그곳에 가는 걸로 생각하고 따라나섰다. 그러나 엄마가 도착한 곳은 어느 채소 가게 앞이었다. 그리고는 바구니에 한가득 담겨 있는 생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1kg에 얼마예요?”


씨앗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종묘상에서 구매하는 것일 테고, 정확하게 원하는 품종이 있을 때는 인터넷에서 그 이름을 검색해 구매하기도 한다. 서로 채종한 씨앗을 나누고 교환하는 일은 식물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씨앗을 구하고 콩, 무, 당근 등 여러 채소들의 씨앗을 사러 종묘상에 따라간 적도 많았지만 씨앗을 사러 채소 가게를 가는 건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생강은 씨앗이랄 게 따로 없고 우리가 먹는 그 부분이 씨앗 역할을 한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때는 우리가 먹는 그대로를 심어서 씨앗으로 쓴다는 사실이 엄청 놀라웠다. 얼마 전 밭에 놀러 온 친구가 씨앗을 하기 위해 말려 둔 옥수수를 보며 정말 옥수수를 심어서 옥수수가 나오는 거냐며 신기해했다. 아마 이 날의 내 마음 같았겠지. 가끔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자연의 법칙을, 그리고 그를 따르는 농사의 방법들을 마주할 때 새삼스레 깨닫고 놀랄 때가 많다.


시장에서 사온 생강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면 심을 준비가 다 되었다.


시장에서 사 온 생강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밭에 바로 심을 준비를 했다. 한 조각 안에 눈이 최소 하나는 포함되어야 거기서 싹을 틔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눈이 없는 생강을 심으면 거기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하나를 자르는 데에도 아주 조심스러웠다. 내가 잘못 잘라서 생강만 버리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으면 어떡해. 고심하며 자르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그냥 하라고 했다. 아주 작게 자르지 않는 이상 눈이 없는 일은 없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라도 된다.


구멍을 파고 하나에 하나씩 심어준다.


작게 자른 생강은 밭으로 가져가서 밭에 바로 심는다. 길게 고랑을 만들어 그 안에 간격을 두어 심기도 하고, 아예 간격을 두고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하나씩 심기도 한다. 그리고 흙으로 잘 덮어준 생강 밭 전체를 볏짚으로 한 번 더 덮어준다. 생강을 심고 키우는 과정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느낀 게 이 볏짚을 덮어주는 일이이었다. 볏짚은 주변에서 구하기도 어려워 매년 고생을 해오고 있는데 대체 이걸 왜 해줘야 하는 건가. 4월, 이른 봄의 낮은 온도 때문인가 했지만 이보다 먼저, 같은 방식으로 심은 감자는 특별히 무언가를 덮어주지 않았다. 어쩐 일로 엄마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시는지 그저 "생강은 덮어주던데?" 할 뿐이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보니 감자는 그 자체가 가진 영양분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생강은 땅 속의 물을 흡수하여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수분 관리가 매우 중요한 작물이라고 했다. 햇빛을 그대로 받는 맨땅의 흙은 물이 금방 마르지만 볏짚을 덮어두면 그만큼 수분을 머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멀칭을 하는 것이었다.


생강을 다 심고 나면 그 위를 볏짚으로 덮어준다.


생강을 심고 싹을 틔우기까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4월 11일에 심고 6월 15일에 첫 싹을 봤으니 싹을 틔우는데만 두 달이 넘게 걸린 것이다. 빨리 싹이 나오는 작물은 심고 며칠 만에도 나오니 그야말로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그 사이 혹시 내가 잘못 잘랐나, 심을 때 눈을 아래로 심어서 못 나오는 건가, 물을 너무 안 줬나 별 생각을 다 했는데 그냥 원래 생강이 느린 작물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내 성격이 드러나는지 원래 그런 일, 별 거 아닌 일에 걱정을 얹고 또 얹고 있는 나를 보며 너무 마음 쓰지 말자 다짐하는데 이게 참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싹만 늦게 나오는 게 아니라 잎이 자라고 무성해지는 속도도 느려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야지만 그 성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6월 15일, 첫 싹을 보여주고는 한 달 뒤에나 그럴듯하게 잎이 자랐다.
세 달 뒤, 10월에 들어서자 부쩍 자란 생강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심고 수확하는 생강의 용도는 생강청을 만드는 게 주였다. 그때 키우던 김장 재료들은 배추와 무 같은 주재료뿐이었다. 그래서 고추(고춧가루), 마늘, 생강 같은 부재료들은 사서 했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김장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생강을 심고 수확하는 양도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생강을 수확하는 시기도 김장을 기준으로 한다. 주로 11월 중 이모들과 날짜 맞는 날을 고르는데 절기로는 입동과 소설쯤이다. 입동의 채소가 생강이 된 것도, 소설의 채소로 배추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전부 김장과 관련이 있다.


생강을 수확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땅콩을 수확할 때처럼 잎을 잘 잡고 한쪽 발로 땅을 야무지게 디딘 뒤 힘껏 잡아당겨 뽑아내는 것이다. 참고로 생강이 흙 속에서 자라다 보니 흔히들 우리가 먹는 부분을 뿌리로 생각하지만 사실 생강은 뿌리줄기(근경)이다. 줄기가 뿌리처럼 땅속으로 뻗어 나가고 그 마디에서 뿌리가 나면서 자란다. 잔뿌리로 흙을 꽉 붙잡고 있으면 뽑기 어려운데 생강의 뿌리는 굵고 쭉쭉 뻗어 있으며 잔뿌리가 많지 않아서 쉽게 뽑혀 올라온다. 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을 통통하게 머금고 있어서 생강이 크는 데 물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뽑은 생강들을 한쪽에 쌓아두었다가 줄기와 뿌리를 나누고 우리가 먹는 뿌리줄기 부분만 모으면 수확이 끝난다. 사실 생강 중에도 우리가 먹는 생강 외에 관상용 생강이 있다. 외떡잎식물로 잎이 나오는 모습은 대부분 비슷한데 크기가 엄청 커지는 생강, 잎에 무늬가 있어 예쁜 잎을 감상하는 생강, 벌집을 닮은 독특한 모양의 꽃(정확히 말하면 이것도 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꽃을 감싸고 있는 포엽)을 보여주는 생강도 존재한다. 신기한 점은 이들의 잎에서도 생강 향이 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는 무늬 생강의 잎을 정리하기 위해 잘라낼 때 그 잘린 면에서 나오는 은은한 생강 향을 맡으며 ‘너도 생강이 맞긴 맞는구나!’했다. 이번에 생강을 수확하며 줄기를 부러트려 정리하면 거기서도 은은한 생강 향이 났다. 이렇게 각자가 가진 독특한 향을 맡고 즐기는 것도 수확의 또 다른 기쁨이 되었다.



엄마의 시범이 끝나면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된다. 전부 뽑아다 한쪽에 쌓아두고 다 뽑고 나서 한쪽에 앉아 필요 없는 부분들을 정리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는 엄마에게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다른 일을 하시라 보내 두고 당당하게 혼자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 포엽이 예쁘다며 감탄도 하고, 굵고 통통한 뿌리를 보며 신기해도 하고, 잎을 정리하며 나는 은은한 생강 향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물론 의자를 두고 앉기는 했지만 쪼그리고 있으려니 허리도 아프고, 구부리고 있는 무릎도 아파 온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에 몸이 배배 꼬여갈 때쯤, 다행히 끝이 보였다. 아랫밭에서 수확해 둔 들깨를 다 살피고 올라온 엄마가 아직도 하고 있는 거냐며 놀랐다. 이것도 대충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엄청나게 오래 걸렸지만 다 해서 들여놓은 걸 본 엄마의 "예쁘게도 해놨네!" 하는 칭찬 한 마디에 아프던 허리가 다 났는 것 같았다.


가운데 아래쪽에 달린 누런 부분은 씨앗으로 심어주었던 씨생강이다.


작년에는 생강 농사가 잘 안 됐는데 올해는 엄마와 같이 가서 사 왔던 씨생강이 건강했는지 아주 튼튼하고 알찬 생강을 많이 수확했다. 다 마른 껍질을 다시 불려서 까는 것보다 마르기 전에 긁어서 까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수확 후 집에 가져와서 바로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호흡기가 약한 아빠와 나, 몸이 찬 동생은 매년 생강청으로 겨울을 나왔다. 깨끗하게 손질한 생강을 착즙기에 넣어 생강즙을 걸러내고 생강즙과 비정제 설탕을 1:1 비율로 넣어 한소끔 끓인다. 뜨거운 생강청이 한 차례 식고 나서 맛을 보고 너무 매운맛이 강하면 꿀을 조금 넣어준다. 우리 집에서 만드는 생강청은 양이 많기 때문에 끓이기도 한참을 끓인다. 마치 청국장을 끓여 먹고 나면 한동안 집에서도 청국장 냄새가 나듯이 이 때는 밖에 나갔다 오면 생강 향이 온 집 안에 진동한다. 생강 향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이 남은 향까지 기분 좋게 즐긴다. 이렇게 완성된 생강청은 동생 집에 한 병 나눠주고, 다가올 겨울을 함께 보낼 다정한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선물하고 나면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끝난다.

keyword
이전 12화"상강"의 맛, 호박 밥알 인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