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해야 할 선택과 결정
가방을 메고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고 있는 큰 아들을 보고 우리는 박장대소가 터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큰 아들은 요즘 말하는 빠른 84다. 83년생 1학년 또래에 비해 몸집이 조금 작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느라 고개를 숙이는데 등 뒤에 맨 가방이 머리 앞으로 쏟아진 것이다.
“어머니.....°°°”
아들은 도와 달라는데 엄마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느라 정신이 없다. 겨우 허리를 세웠지만 이번엔 가방 무게에 탄력을 받아 뒤로 넘어가서 벌러덩 누워 버린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작은 몸집에 비해 가방이 무겁다. 한바탕 서로를 보면서 웃고 있지만 저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애써 참는다. 아침부터 큰 아들이 주는 유쾌한 웃음에도 명치가 아리면서 자꾸 치밀고 올라오는 무엇 때문에 울컥한다.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무거운 가방이 뒤통수를 칠 만큼 깊숙이 인사를 하고 활짝 웃으며 손 흔드는 아이의 뒷모습에 또 휘청한다. 집에서 학교까지 족히 200미터는 넘는다. 다행히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위험은 없지만 7살 아이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혼자 걸어가기엔 꽤 먼 거리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가방도 들어주고 삼부자가 운동 삼아 같이 가던 길을 이제 혼자 견뎌 낼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기어이 혼자 보내고 약해지는 내 마음을 다 잡아본다.
오늘도 수줍게 웃는 아들의 얼굴에서 남편의 선한 미소를 본다.
내 삶에서 용서하고 싶은 첫 번째 사건이다.
아버지가 없으니 아들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근거 없는 무지한 판단이 그 시작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함, 단순함, 끔찍할 만큼 잘못된 생각이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을 엄마가 대신하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줄 생각은 왜 못했을까?
나도 이렇게 힘들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이제 7살 아이에게 난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어리석은 생각은 아이들이 엄마까지 잃게 하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집에서 그대로 사는 것이 맞을까? 이사를 가는 것이 나을까? 이사를 한다면 어디로 갈 거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아이들도 나도 잘 사는 것일까? 한 겨울 허허벌판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의 냉기를 알몸으로 맞서고 있는 것 같다.
시아주버님을 찾아뵙고 상의를 할까. 친정아버지를 찾아가서 여쭤볼까. 누구에게 나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까?
친정부모님에게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시댁에는 아이들 팽개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아갈 것이니 걱정 마시라고 안심을 드리고 싶다.(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다 보니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어디 하나 비빌 언덕도 기댈 곳도 없다.
수많은 밤을 새우며 고민한 끝에 아주버님을 찾아가 친정 근처로 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주버님도 형님도 '제수씨 마음 편한 대로 하세요'라시며 힘이 되어 주셨지만 시어머니는 달랐다. '이제 시집 하고는 의논도 안 하고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냐'라고 애먼 소리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신다.(아주버님과 형님도 시집 식구인데...)
다행히 친정과는 한 블록 건너편 알맞은 곳으로 이사를 했고 아이도 전학을 시켰고 나는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특채 고용으로 행원이 아닌 별정직으로 취업이 되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이 되어 가고 있다.
내 삶에서 용서하고 싶은 두 번째 결정이다.
안정적인 수입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선택했던 특채가 이를 썩게 하는 달콤한 사탕이 되었고 친정 가까이 저렴한 금액으로 구입한 집은 우리 가족이 맞게 될 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친정 근처로 이사를 하더라도 전세로 집을 구하고 나머지 돈으로 장사를 하거나 기술을 배웠더라면 남편의 퇴직금도 지킬 수 있었고 우리가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에 반차를 신청하고 큰 아이 학교에 청소를 하러 가는 날이다. 멀리서 엄마를 보고 신나게 달려오는 아들의 어깨와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려있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향해 자랑하듯이...
“우리 어머니다”
나도 엄마가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직장에 매이면서 처음으로 갔던 날이다. 다른 엄마들보다 자주 오지 않는 엄마가 서운했는지 아니면 그리웠는지 아들은 한껏 들떠 있다. 저렇게 좋아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매일 보고 또 봐도 이렇게 좋은데 나의 행동은 마음과 달랐다.
남편의 빈자리는 바로 생활과 연결되었고 남편이 우리에게 해줬던 가장 큰 일을 이제는 내가 다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특별한 기술도 능력도 없이 할 줄 아는 것은 집 안일 뿐인데 특별채용이라는 배려로 남편의 49재가 끝나기도 전에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남편이 마지막까지 근무했던 바로 그 건물에서 나의 새로운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전혀 낯설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세상은 절대로 호락호락 만만하지 않았다.
‘남편은 죽고 없는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다닌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남편 없으니 기가 팍 죽어서 못 보겠네.’ 들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수시로 들려오는 쑥덕대는 소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으면 웃는다고 흉보고 조용하게 말이 없으면 기가 죽어 보여서 불쌍하다면서 입을 대는 것이다.
원래 인사성이 밝은 편이었고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감사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든지 웃으며 인사를 했고, 예전에 가끔 보던 남편 입사 동기들과 선, 후배 동료들이 지금은 나의 직장 동료가 되었으니 밝은 인사는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뒷얘기 거리가 될 줄 몰랐다.
예전 TV프로그램 중에 '그래 결심했어'라는 코너처럼 지난날 내가 했던 선택의 방향이 달랐다면 힘들었던 내 삶이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와 아쉬움보다는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아이들이 받은 상처를 너무 늦게 알게 되면서 지금이라도 아니, 더 나중에라도 그 상처들이 조금이나마 무뎌지고 연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잘 버텨왔던 나에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