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취향은요
소설을 쓸 때 명확한 청사진을 그리지 않고 대략적인 분위기, 모호한 인상을 가지고 시작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책이나 음악, 영화 같은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이번에 소개할 책들은 내가 영감을 받은, 그리고 앞으로도 받을 예정(?)인 소설들이다. 내게 좋았던 작품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러하길 바라며 취맛의 첫 글을 시작해본다.
1.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 로맹 가리, <여자의 빛>
<자기 앞의 생>으로도 잘 알려진 로맹 가리(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의 소설 <여자의 빛>은 개인적으로 <자기 앞의 생>만큼이나, 아니 이 소설보다 더 좋아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셸이 술에 취해 늘어놓는 횡설수설도, 야니크와 미셸, 리디아가 토로하는 사랑에 대한 생각도, 그들이 바라보는 삶 또한 내겐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삶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할 수 있는 소설이 <여자의 빛>이다.
나는 가차 없는 절박함에 들러싸여 있었다. 불안감 때문에 나를 드러낼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사태를 직면하고 상대를 죽게 내버려두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다.
"우리는 나약함으로 터져 나갈 지경이지만, 그것에서 온갖 희망이 나온다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살아야 할 이유까지 같이 죽는 건 참을 수 없어. 진짜 여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남자가 되려면 먼저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약속해줘. 슬픔에 겨워 경박한 짓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가시덤불과 폐허로 둘러싸인 잿빛 거처여도 말이야. 이런, 안 돼! 나는 죽음이 자기 몫 이상의 승리를 거두기를 원치 않아. 당신은 이중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추억의 담장 안에 칩거해선 안 돼. 나는 돌 같은 무생물을 돕고 싶진 않아. 우리는 행복했어. 그러니 앞으로도 행복할 의무가 있어.'
2.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회상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여자의 빛>보다는 비교적 밝고 따스하며 목가적인 분위기와 낭만성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두 남녀의 사랑도 죽음이라는 장벽에 가로 막히기 때문에 비극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녀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작가의 탁월한 표현력 - 작가는 철학자이자 언어학자로 이 특성이 작품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 에 힘입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시나 그림, 책, 그리고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상당한 깊이를 자랑하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네가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있구나. 네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렴. 그러면 너도 행복해지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거야."
"진정한 시인이 진리와 아름다움을 완벽한 음률로 노래 할 수 있듯이 인간은 온갖 사회적 속박에 굴하지 않고 사고와 감정의 자유를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걸 깨닫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의 표현은 언제든 쉽게 꾸며 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받고 있는 것도 모를 것 같아.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랑을 믿는 만큼만 다른 사람의 사랑도 믿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