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쁨

박완서'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읽고서

by 조승희

밤에 몰래 강을 건너기 위해 다섯 살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였습니다. 미스 트롯의 한 참자가가 한국으로 올 때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원래 텔레비전에서 누군가가 울면 따라 우는 사람인지라 나도 그녀를 따라 조용히 눈물을 흘렀다. 잊고 있던 시 한 편이 문득 생각이 났다. 내용은 오롯한데 시인의 이름과 제목은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네이버 창을 열고 ‘죽은 아이와 관련되는 시’라는 검색어를 넣어보았다. 실패다. 검색어를 바꾸어 보았다. ‘강, 아이, 시’ 이렇게 몇 번 자판을 치고 스크롤을 내리는 데 그만 또 눈물이 났다.


자식의 죽음을 다루는 작품들을 가끔 읽는다. 불과 며칠 전에도 박완서 소설가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음성으로 듣다가 가던 길에 멈추어 서서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박완서 소설가가 아들을 돌연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것을 안다. 수필집에서도 그때의 심정을 위로받는 것도 위로를 받지 않는 것도 견딜 수가 없던 나날들이었다고 절절하게 풀어놓지 않으셨던가. 담담한 어투에서 묻어나는 슬픔은 몇 번 곱씹어야만 그 단맛을 들어내는 거친 현미쌀 같은 깊은 절망과 감동을 안겨주곤 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란 작품은 자식을 잃고 살아온 동서가 형님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동서의 대사로만 오롯이 진행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다. 자식의 죽음을 힘겹게 받아들이고 이겨내 보려는 화자의 남모르는 마음 상태를 세세히 풀어내 준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대비하고 싶기에 이런 글들에 매달리는 것일까. 어쩌면 내 살아생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을 미리 내 일처럼 겪어보고 극복해보고 싶은 이 자학적인 불안의 실체는 무엇일까. 실체 없는 걱정으로 우울에 빠지는 것이 버려진 쓰레기를 내 집 앞에 가져다 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일까. 분명 머리로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자식의 죽음을 남의 자식의 죽음과 똑같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지혜의 부족인가, 수행의 부족인가, 인지상정인 것인가.

이런 무거움을 안고 눈물 바람으로 시작된 소설은 화자의 슬픔을 따라 전개라는 고개를 넘는다. 작가는 힘겨움 속에서 깨달아 가는 새로운 삶의 자세로 글의 위기 부분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전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게 중요해요. 남을 위해서 나를 속이기 싫어요. 무엇보다 피곤해요.”

소설은 어쩔 수 없이 닥친 불행이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삶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게 된다는 해피엔딩을 항해 절정의 고개를 지난다. 이즈음 되면 독자인 내가 작가를 이긴 것만 같다. 작가가 짜낸 플롯이 예상 범위 안에서 전개될 때 탐정 독자가 갖는 즐거움이 나를 흥분시킨다.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딴 사람 이야기처럼 의뭉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다. 거짓말이라는 전제로 시작되는 글쓰기이기에 도덕적 잣대나 양심의 가책에서 다소 벗어나 마음의 이야기를 좀 더 솔직히 까발릴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속여보겠다고 작정하고 꾸민 이야기로 읽는 이를 절벽 끄트머리까지 야멸차게 몰려간다. 어떻게 속일 것인지 작가의 계략을 놓치지 않으려 탐정이 된 독자는 알면서도 가차 없이 몰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게임이 끝나갈 때 즈음 독자는 숨겨진 그 무엇이 남아있기를 기대하게 되며 결국 작가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신세를 자처하고 싶어 진다.


진짜 자식을 잃은 마음은 어떠한가. 새롭게 살아보려는 그 마음에 거짓은 없는가. 남의 지혜가 나의 생활이 될 수 있는가. 그 끝을 가식 없이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결말에서 위로가 아닌 진실을 발견한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인간적 진실이, 고통을 감내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이 그곳에 오롯이 있었기에, 독자의 패배는 역시 기쁨의 눈물을 불러왔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그 수수께끼의 답은 나만의 오답일 수 있기에 물음표로 남겨둔다.


작가의 손에 밀려 결국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끔 만들어 준 소설이었다. 떨어진 자만이 다시 태어난 기쁨을 누릴 수 있도 있는 환희를 선물 받았다. 만성 소화불량으로 부글거리는 나의 속이 잠깐 시원해졌다. 홍차 한 잔처럼 잔잔하고 담담한 수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름날 저녁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 한 캔이다. 추천을 요하지 않은 추천을 삼가자고 마음먹었건만 그 선물을 공유하고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육아로 고민하는 지인들 단톡 방 문 앞에 링크 상자를 놓아두고 돌아섰다. ‘일 보 전진 다섯 보 후퇴’ 거창한 지혜에서는 후퇴했을 지라도 일 보 정진의 날이라 기록한다.



ps

민간인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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