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공간으로의 떠남을 기원하며

승효상 건축가의 책들을 읽으며

by 조승희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라. 그 지도 속 우리의 땅은 산과 계곡이 분명하여 물길과 양지바른 터가 아름다운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곳이다. 이 터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터무니'이니, 이 단어는 우리의 존재와 이유가 모두 터에 있다고 믿은 우리 선조의 관념어이다.

어쩌면 땅은 그 스스로 어떤 건축이 되고 싶은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기로는 모름지기 좋은 건축가, 좋은 도시계획가는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이며 좋은 건축, 좋은 도시란 그 터가 가진 무늬에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지난 시절의 무늬와 함께 그 결이 더욱 깊어 가는 곳일 게다. 그게 터무니 있는 건축이며 그러함으로 터무니 있는 삶이 생겨난다.

보이지 않는 도시, 움직이는 건축


승효상의 책을 읽기 전, 건축은 내게 건물 또는 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각이 훌륭한 유럽의 건물 앞에 설 때나 '서양미술사' 곰브리치의 글을 읽어나갈 때면 건축도 예술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었다. 이런 문장으로 사유하는 사람의 직업이 작가가 아닌 건축가라는 사실에 흥미가 생겼고 그의 글발에 매혹되어 그가 쓴 책들을 탐독했다.


건축설계라는 것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일이며 건축은 어디까지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공학은 그 공간의 조직이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기술이며, 예술로 보는 것은 그 공간을 감싼 겉가죽을 조형물로 느낀 결과라 이 모두가 건축의 부분적 속성일 따름이지 건축의 본질은 아니다.

-오래된.것들은.다.아름답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우리 삶을 영위하는 내부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며 따라서 그 공간이 보다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불행하게도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니어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가 어떤 건축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거의 다 그 건축 속에 빛이 내려앉아 빚어진 공간의 특별함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간은 보이지 않는 까닭에 남에게 그 감동적 건축을 설명할 때면 대게 천장의 모양이나 벽과 바닥의 장식 등을 이야기할 뿐이어서 이를 듣는 순간 공간은 사라지고 건축은 잘못 설명되고 만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승효상은 이렇게 건축이란 개념을 공학에서 예술로, 다시 ‘공간’이라는 의미로 나를 이끌었다. '공간적' 림을 주었던 인생의 몇몇 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것들은 시간과 삶과 공간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하모니 같은 것이었다.

일본 시코쿠의 가가와현에는 나오시마라는 섬이 있다. 나오시마는 가가와현 다카마쓰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세토내해의 작은 섬으로 구리 제련소가 있던 곳이었다. 이 곳을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베네세 그룹의 후쿠다카 쇼이치로가 힘을 합쳐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시켰다. 세상에서 하나뿐이 갤러리를 만들어보자는 말에 시작된 나오시마 프로젝트. 원래 있던 집들과 골목을 그대로 보존하며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꾸민 아트 하우스 프로젝트를 비롯,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빛의 미술관으로 유명한 지중미술관과 베네세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 조용한 마을은 조심스레 사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몇 년 전 자연과 예술, 건축이 함께 만들어내는 행복의 순간을 만끽해보겠다고 나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타카시마로, 다시 첫 배를 타고 나오시마로 향했다. 여기에요. 하고 손짓을 하지도 않고 찾아오면 맞이하고 아니면 말고. 진짜 마을의 일부분인 듯 조용히 존재하고 있던 나오시마 곳곳의 미술관들은 이 작은 마을에 마치 보물찾기 하듯 군데군데 서 있었다.


그중 제일 인상적이라 잊히지 않는 곳이 ‘미나미 데라’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내인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아주 깜깜한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안내인은 안으로 들어가면 의자가 나오고 5분 정도 있으면 저 앞에서 서서히 밝은 빛이 비치어 온다고 한다. 그러면 그쪽으로 걸어가 보면 된다고 했다. 암흑 같은 그곳의 벽에 손을 대게 해서 그 감각만을 의지하여 건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안내받으면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어둠 속에서의 5분은 황진이가 동짓달 베어낸 기나긴 밤의 한 허리라도 되는 것인가.

‘시간이 마법이라도 부리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다시 솔솔 풀어져서 이 5분에 덧붙기라도 하는 걸까. 정말 5분이 맞을까. 이것이 외로움인가. 이런 낯선 공간은 두렵지만 어둠이 아늑하기도 하네.’ 처음엔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다가 어느 순간 5분은 참 길다, 하는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밝아지는 건지 아닌지 모르게 서서히 밝아지는 저 편. 걸어가야 할 타임인지 아닌지 소심하게 망설이다 걸어가니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면 바로 부딪힐 것 같은 벽. 한 발 물러서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의 벽. 혼자 그 어둠 속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다가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 10여 분 간의 시간이 너무 신비로워서 밖으로 나와 햇살을 보는데 눈이 부셨다. 이 영롱한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일까. 분명 그것은 기쁨의 표식이었다. 낯설고 설레고 그러면서 포근한 느낌을 이런 공간에 준비해 둔 사람들이 고마웠다. 혼자 떠나온 외로운 여행에서 이런 순간은 이 여정에서 더 이상 감동의 여분이 남아있지 않아도 괜찮을 충분한 보상이었다. 지금도 선명한 공간의 추억이다.

분명 떠났기 때문에 더 극적이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간이 주는 행복을 일상에서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겨울 오후 2시의 햇살이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따듯한 이부자리에 드는 것만큼이나 포근하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아주 오래된 2층 양옥집이다. 가정집 1층을 세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부방으로 쓰고 있다. 인테리어를 맡겼던 분의 아이디어로 대문을 열고 작은 마당을 지나 1층 문을 열게 되는 그 공간을 나무데크로 꾸몄다. 그 마당에 벤치도 만들고 화단도 만들고 차를 마시기 위한 의자들도 서너 개 두었다. 1층으로 오르는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무슨 봄볕의 향연이라도 펼쳐지는 듯 겨울에도 그 좁은 공간에는 햇빛이 찬란하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 언니와 함께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 그곳에 앉는다. 아무리 바빠도 그 햇살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므로 학생들이 하나 둘 올 때까지는 겨울 소풍을 즐기는 것이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의자를 치우고 돗자리를 깔고 시원한 차를 내어 봄소풍을 즐긴다. 그러다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오면 수업을 하러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어 “너도 여기 좀 앉아봐라.” 하면서 수업 시간을 소풍 시간으로 둔갑시키고는 하는 곳이다. 봄이면 옆에 심어 둔 천리향 향이 솔솔 흘러나오는 그곳에서 말없이 있어도 편안한 그런 공간. 먼 훗날 내가 이 집 앞을 다시 지나가게 되며 가지게 될 그 느낌은 내 삶과 시간이란 결을 더해 여행에서 느꼈던 감동만큼이나 전율적이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여행이 우리의 삶에 유효한 두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이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그 결과로 여행은 우리를 종파주의와 그릇된 편견과 헛된 애국심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더없이 풍요롭게 보인다.
건축을 하는 한 나는 늘 여행길에 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환상과 실체 사이에 있는 간극의 크기를 항상 절감할 것이며 그로써 이방인이 된 즐거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여행이 주는 이 매력은 치명적이며 따라서 내 평생 결단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중에


분명 홀로 되야 하는 여행에는 정다운 수다나 동행자가 주는 든든함, 함께 쌓는 추억 등은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어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는 될 수 있는 순간들이 분명 더 많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나를 ‘이방인이 된 즐거움’에 흠뻑 젖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건축에 관한 책들을 함께 읽는 이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여행의 구상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부석사와 병산서원을 함께 거닐며 작가가 극찬한 공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도 보고 DDP와 ECC 같은 건물을 둘러보며 이 공간들이 과연 이 도시와 조화롭지 못한 건축들인가도 토론하고 싶다. 완벽한 르 트로네 수도원과 허술한 영산암의 차이에 대해, 공간 사옥과 남향동 고문실을 돌아보며 김수근이라는 한국 대표 건축가의 상반된 평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김정희의 감자 창고와 종묘의 월대는 그래도 좀 심심하지 않은가 하고 딴지도 걸어보고 차를 댈 수 없는 단차 있는 길이 왜 진정한 도시의 길인지 생각하며 가로수길을 다시 걸어도 보고 싶다. 길을 가다가 문득 멈추고 가만히 앉았다가 무언가 생각 난 듯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지인들과 건축 기행이 아닌 아름다운 공간 기행을 떠나고 싶다.

이런 신나는 상상은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여행은 시간과 돈이 아니라 간절함에서 실현된다고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이제 다시 일터로 떠나야 하는 일상에 놓여있다.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내게 주어진 30분의 산책을 신나게 즐겨볼 것 아닌가?


우리 집 뒷산을 지나 일터로 가는 길에는 ‘감천문화마을’이 있다. 50년대 피란민들이 모여 살 던 산 아래 마을이다. 언젠가부터 달동네 마을 벽화 그리기가 유명해지면서 이곳도 대한민국의 산토리니란 별명이 붙으며 관광화 되었다. 조용하던 마을에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들며 지금은 언제 가도 사람으로 북적인다. 그리고 벽화 마을에 많이 익숙해진 한국인 관광객들은 ‘생각보다 별 것 없는데.’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한 바퀴 휭 돌고 사진 찍고 돌아가기 바쁘다. 그러나 그곳의 꼬불꼬불 골목길은 벽화가 그려진 지금이나 사뭇 으스스하던 분위기의 옛날이나 크게 변화하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더 깊숙이 들어가야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의 오묘한 매력을 탐험하러 그 길의 끝까지 걸어가는 관광객은 아주 드물어서 골목 초입을 벗어나면 여전히 스산하다.

혼자 그 골목의 끝이 어디인가 마음을 조리며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높은 곳에도 참 많은 사람들의 사는구나, 그래서 어쩌면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나를 가로막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도 곳곳에 그려진 그림이나 햇볕에 몸을 쬐는 빨래들을 보며 길의 끝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 다시 어느 평범한 동네의 어딘가에 서게 된다. 출발한 곳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새로운 곳이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에는 긴장감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아 물어물어 큰길을 찾아 내려오니 너무나 익숙한 큰 길이 나를 반겼다.


일상 속에서도 여행에서 느끼는 긴장과 낯섦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사람이 북적인다고, 너무 상업화되어 간다고 많이 상심할 필요는 없겠다. 눈을 귀를 코를 그리고 온 마음을 집중하여 내가 걷는 길과 공간을 대한다면 그 공간도 내게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내면을 조금 더 보여주지 않을까?

아주 좁은 공간이라도 틈만 있다면 그 빈 곳을 노리고 상업 건물이 비집고 들어온다. 자주 다니는 동네 시장 입구에 세로로 긴, 높은 건물이 새롭게 생겼다. 사람들은 더 좁아진 도로를 한탄하며 어떻게 여기에 이런 모양의 건물이 생길 수가 있지, 참 대단하다고 비꼬아가며 한 마디씩 던졌다. 지금 그곳엔 어린이 병원과 안경점, 약국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스시’ 체인점까지 들어오며 입지를 굳혔다. 이제는 이미 태어난 생명이니 매일 지나다닐 그 길에 들어선 새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정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가? 시간이 쌓여 ‘너와 자주 가던 곳이야. 우리에게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지. 저곳이 사라지면 제법 섭섭하겠는 걸.’하고 말할 수 있도록 나와 관계된 공간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 나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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