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Aug 06. 2021

공명(共鳴)과 공생(共生)

 


가문비나무, 처음 듣는 나무이름에 호기심이 일었다. 단단하게 자란 가문비나무는 입이 뾰족하고 높이가 30m 이상이다. 소나무과의 상록 침엽수라는데 붉은 보라색 달걀 모양의 꽃이 피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고지대의 척박한 환경, 메마른 땅이라야 잘 자란다는 나무. 세계적인 바이올린 명장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극한 추위에 노출된 가문비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은 명품으로 유명하다. 더 추울수록 더 촘촘한 목재를 만들어 낸다는 가문비나무. 시련을 극복해야 울림의 소명을 받는다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죽은 가지를 스스로 떨구어내었을까.  


 8월이 되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있다. 간헐적 단식과 새벽 기상 읽고 쓰기다. 단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애쓰고 있으나 쉽지가 않다. 어제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야식 잔치를 벌였다. 맛있게 먹고 곧 후회했다. 후회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다이어트는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함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애쓰는 행위에는 무언가 나답지 않은 억지스러움이 있었다. 새벽 기상은 달랐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다. 글 한 편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애쓰니 몇 개의 단락이 만들어졌다. 훌쩍 흘러간 시간, 아침을 몰고 오는 헬리오스 신이 야속할 정도였다. 나의 행복을 위한 자처하는 애씀은 얼마나 큰 보람이고 행복인가.

 

 '각자의 공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온전한 나를 알아간다는 것, 그런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뚱뚱하면 뚱뚱한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대로, 공부를 못해도, 돈을 못 벌어도, 성격이 모났어도 친구가 없어도 눈이 보이지 않거나 다리가 하나 없어도 나는 괜찮을까. 괜찮지 않았기에 저울 눈금에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타인의 칭찬에 귀가 쫑긋했다. 뚱뚱해지면 사랑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내 마음을 생채기 내면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저울 눈금에서 마음이 해방되어야, 뚱뚱하고 못난 다른 이를 보는 동정심이나 불편한 마음들이 사라질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공명을 진정으로 인정해 줄 수 없는 테니까.


 가문비나무는 행복했을까. 자신이 가진 풍성했던 가지들을 다 떨구어 내고도 괜찮았을까. 바이올린이 되는 소명은 진짜 가문비나무 자신의 것이었을까. 때가 되면 붉은 보라색 꽃을 피우며 바람에 오래도록 흔들리며 살고 싶지 않았을까. 꽃 피우고 굳건히 자리를 자리를 지키는 삶이든, 베어져 명품으로 거듭나는 삶이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여야 한다. 내가 걸치고 있는 옷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적나라해질 때,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모두 잊을 때 자신의 공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더 충만해지고 더 아름답게 울려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이 가는 것을 애달파하는 나는 몸무게에 애달파하는 나에게 더 너그러웠듯 나의 공명(共鳴)을 찾아야 진정한 공생(共生)도 가능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빵과 삶을 구우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