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뭄바이에선 전 세계가 낳은 다양한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각양각색의 얼굴들 틈에서 깨닫는다. 얼굴이야 말로 사람 감정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상품 디자인임을. 이 디자인이 평생 타인이 돌아보는 관심의 양을 결정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이목구비가 동글동글 밋밋한 평범한 한국 여자라고 야멸찬 세상이 결론지어 주었다. 그 판단에 도무지 굴복할 수 없었던 나는 지루하고 진부한 디자인을 개선할 길을 끝없이 찾아다녔다. 평범한 이목구비가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세련미를 갖추려면 몇 개의 날카로운 장식 포인트가 필요하다. 눈 끝 선을 좀 더 바깥으로 빼주는 뾰족한 아이라인, 평범보다 좀 더 비범한 피어싱, 독특하지만 독하지 않은 타투. 이 정도를 갖추고 있으면, 어디서건 스쳐 지나가는 시선보다 약간 과한 응시를 끌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렇다. 나는 관종이다. 관심을 받아야 채워지는 이 욕구가 나를 언제나 따라다닌다. 나에게 북극여우를 보여주었던 아빠가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엄마가 재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나에게 관심을 거의 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스스의 힘으로 필요한 관심을 찾아 채우는 관종이 되었다. 일찍 결혼을 하게 된 것도, 그 근원은 관심을 갈구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현실도 일찍 깨달았다. 결혼은 관종 욕구를 채우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결코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 두 가지가 이유였다. 그 첫 번째는 남편이 가진, 성공을 갈구하는 욕구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적 욕구를 알면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이 보인다. 행동 패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상대는 내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이 가진 습관 대로, 그는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고, 일에 에너지를 진탕 소진한 후, 정해진 시간에 집에 들어와 계산된 칼로리의 익숙한 음식을 먹고, 정해진 곳에서 정한 시간만큼 잠을 자는 정확한 루틴을 따라 산다. 두 번째는 남편이 나를 이곳 뭄바이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낯선 이곳이 나의 일상과 인간관계를 절로 제한해 줄 거라 믿고 있는 그는 나의 자유로운 일상과 비용 지출에 전에 없이 더욱 관대하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 조금만 검색해 본다면, 당신은 곧 알게 된다. 이곳이 수억 달러 자산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 재벌과 자산가들이 모여 사는 세계 10대 부자 도시 안에 드는 인도 경제의 중심지라는 것,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화 사업이 번성한 발리우드의 메카라는 것, 인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날씨 좋고 물 좋고 낭만 가득한 해변 도시라는 것. 돈 있고,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만 없으면 이곳은 말 그대로 관종들의 지상낙원, 아시아의 캘리포니아, 할리우드다.
관종은 영어를 금방 익혔다. 한국인의 관심보다 더 격식 없고 속 편한 것이 외국인의 관심이고, 외국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관심은 집안의 재산을 가져다 쓰는 시간도 부족한 정말 말 그대로 '할 일 없는 청춘' 인도 재벌 집 자녀들의 관심이다. 관심을 주는 부모의 언어를 단시간에 익히는 아기처럼, 관심을 베푸는 '녀석들'의 언어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대로 흡수가 되었다.
처음엔 '녀석들'이 외국인과 영어로 이야기하며 영어를 연습하고 싶은 건가 생각했다. 아니면 외국인 여자와의 '쉬운 섹스'를 원한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그들 기준 헐값의 원어민 영어교사가 뭄바이 도처에 널려있고, 한국인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예쁘고 어린 외국인 아가씨들은 더 많이 널려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영어는 더없이 유창하고,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수많은 '녀석들'을 만나본 후 깨달았다. 이들은 정말 말 그대로 '할 일 없어' 심심한 거였다. 그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걸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국인 여자들은 재벌 자녀를 걸고넘어져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야심이 없는 편이며, 곧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외국인 여자들, 남편이 있는 조심스러운 유부녀 외국인 여자들은 이들이 며칠 놀고 끊어내기에 더없이 안전한 이야기 상대 놀이 상대인 것이었다.
아난트도 결국 그런 '녀석들'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뭄바이 어디에 서서 봐도 시야에서 가려지지 않는 고층 건물 재벌집 아들이라는 그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녀석들' 보다는 조금 더 영어 발음이 좋다는 차이 정도가 있다고 할까. 부모님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오래 생활을 한 분들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내니와 과외교사들이 모두 미국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인도 사람에게 어렵다는 d, t, th 구분을 분명히 해주는 정확한 발음은 확실히 큰 장점이었다. 발리우드에서 할리우드로 사람의 장르와 세팅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검은 가죽 캡을 푹 눌러쓴 아난트가 '스타벅스' 문을 열고 성큼 들어와, 모자 캡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내 뺨에 다가와 쪽 소리를 내며 프랑스식 인사를 했다. 모자를 돌려 쓴 그대로, 긴 다리를 M자로 접고 낮은 코끼리 의자에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앉아있는 모습이 귀엽다. 순간 나보다 한참 어린애라는 게 느껴져 미안한 기분이 스치지만 나는 '너는 성인이고, 먼저 다가온 건 너야. 네 선택이야.' 하고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아난트를 더욱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인기 한국 배우 '이민호'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그는 '이민호'를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를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그와 이 묘한 플라토닉 데이트를 하는 스무 번째 한국 여자쯤 된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짐작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다섯 번째 만남이다. 사실 대부분은 한두 번의 만남으로 끝난다. 나는 질질 끌어 정드는 게 싫고, 그들은 같은 사람과 계속 노는 일, 반복되는 이야기에 쉽게 질려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난트를 다섯 번이나 만나게 된 건, 이 녀석이 이상한 게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부족한 나는 결핍감이 심하고, 거기에 패배감까지 더할 순 없으므로, 게임에 결코 질 수 없는 나는 다섯 번째 만남까지 와버렸다.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 있어요?"
이것이 이 녀석이 벌이는 게임이다. 이 녀석을 그만 만나고 싶다면, '이제 너한테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 없어. 꺼져'라고 말해버리면 게임 종료. 하지만 왠지, 나는 그의 질문이 '네 인생 뭐 다른 여자들과 별다를 게 있냐?'라고 조롱하는 것처럼 들려, 이 녀석에게 내 삶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아득바득 대답하고 만다.
"당연히 있지. 따라와."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i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