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뭄바이는 한때 봄베이였고, 봄베이는 원래 뭄바이였다고 한다. 뭄바이로 떠나기 몇 개월 전부터 남편은 눈만 마주치면 영국 식민 역사가 어쩌고 뭄바이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그땐 그의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이가 되는 건 슬픈 일이고 낭비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그는 내 글에 관심 없는 것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공존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니까. 다만, 여기 도착해서 혼자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때 좀 자세히 들어뒀을 걸, 그의 말들을 낭비하지 말 걸 싶은 후회를 잠시 했다. 뒤늦은 후회였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냥 서울처럼 지나쳐가는 사람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서비스를 사라고, 자신의 물건을 사라고, 불쌍히 여기고 돈을 달라고, 돈이 아니면 사진이라도 찍어 달라고, 노인들이, 중년들이, 젊은이들이, 아이들이,... 심지어 말문 터진 지 얼마 안 된 아기들까지 울며 부모가 아닌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챘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사이로 소와 개와 고양이와 쥐와 비둘기들이 더불어 공존하며, 생존을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며 호시탐탐 엿보는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큰 몫을 더했다.
혼을 쏙 빼는 아수라장이 이런 곳인가 싶었다. 멍하니 있다간 코베일 것 같은 공포감이 들어, 무작정 보다 안정감을 주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 숨어든 곳이 스타벅스였다. 낯선 곳에서 만난 엄청난 안정감. 세상 어디에나 있는 스타벅스였지만, 이곳의 스타벅스는 특별했다. 경찰이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여 사람을 걸러주는 곳.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이 성지를 통과해 들어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선 다른 세상으로 건너뛴듯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뭄바이의 스타벅스는 서울이나 미국에서 보는 스타벅스 분위기와 많이 달랐다. 스타벅스가 자기 친구 집안에서 관리하는 비즈니스라고 했던 아레즈- 내가 만났던 '녀석들' 중 하나 -의 말이 맞나 보다 느낌이 올 정도로, 인도의 스타벅스는 뭔가 커피도, 파는 음식들도, 스타벅스 매장 인테리어도 인도 최고 계급들이나 드나드는 곳이라는 느낌을 넘치게 풍겼다. 뭄바이의 스타벅스 가게들을 구경하고 이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만도 하나의 문화 관광이었다.
혼자서 길거리를 돌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뭄바이 관광지역 스타벅스들만 전전하며,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사람 구경을 시작했던 나는, 이 곳이 '녀석들'이 드나들며 여자를 '픽업' 하는 장소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왜 밤에 나이트가 아니라 낮에 커피집에서 헌팅을 하는 걸까 했던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그게 안전해요."
'녀석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는 말이었다. 스타벅스가 안전감을 주는 대상은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들과 내가 스타벅스에서 얻어가는 안전이 같은 종류인 걸까 골똘히 생각을 해 보다가 나는 그들이 필요한 안전을 굳이 내가 고민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싶어 그만두었다. 결론은 내가 그들에게 안전하고, 그들이 내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서로의 낮을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안전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나의 저녁과 '녀석들'의 저녁, 우리들의 저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녀석들'의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수많은 '녀석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서 그림이 그려졌다. 그들에게 저녁 시간은 아버지에게 바쳐진 시간, 가족이라는 집단에 바쳐진 시간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자신들에게 재산을 공급하는 아버지가 관리하는 시간. 자신들이 집안의 재산이 되기 위해 관리받는 시간. 때론 계급이 맞는 정혼자를 만나야 하는 시간. 혹은 그들만의 파티가 열리는 시간. 어느 집안의 아들로 활약해야 하는 시간. 아무나와 어울려서 안 되는 최고 계급으로서 만들어 가야 하는 지극히 성스러운 시간.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밤이 가면 낮이 오고,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고 세상 모든 것이 그런 원리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의 뒷면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양심의 가책이나 고통을 느끼지도 않기로 했다. 앞면이 있는 만큼 뒷면이 있는 건 만물의 이치일 뿐이다. 나는 아슬아슬하고 불확실한 자유의 낮을 보내는 만큼, 밤에 집에서 남편에게 공존하는 안정감이 되어 주는 일을 기꺼이 기쁘게 감수한다. 아니, 익숙한 존재의 기둥에 뱃줄을 매는 확실성의 안정감을 저녁 내내 누구보다 내가 누린다. 남편의 현지 직장 동료가 소개해 준 아니샤가 청소와 저녁을 담당해 주고 부터 우리의 저녁 시간은 더욱 여유롭고 편안하다. 인도인의 노동력은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싸다. 덕분에 집에 와 저녁을 먹고 나면 나는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 남편은 내 글엔 관심이 없어도, 생각보다 용돈 벌이는 충분히 하는 '이름 없는 작가'로서의 내 커리어는 적극 밀어주는 편이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나에게 떠들고, 나는 귓등으로 흘려주고,... 그런 저녁이 반복된다. 낮과 밤이 끊임없이 시간을 맞추어 서로의 등 뒤로 숨어주기를 반복하는 한, 일상은 평화롭게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다.
'녀석들'에게 자유 시간인 낮이라 해도 신분이 다른 여자들과 함부로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받았기에, 신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외국 여성이 그들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림이 쉽게 그려졌다. 같은 계급의 인도 여성보다 외국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외국인들은 '녀석들'을 잘 모른다는 점 때문인 것도 있다.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모른다는 베일에 가려진듯한 희미한 익명성은 상상력의 여지가 주는 신비감과 쾌감, 더 나아가 대범해질 자유를 허락하는 법이다.
어쩌면, '녀석들'이 내게 알려준 자신의 이름들 또한 진짜 이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살이 관계를 맺는 외국인을 속여 먹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도덕성의 모양을 선명히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어디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얼마나 속이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 아직 잘 모른다. 나 자신의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도덕성의 모양도 파악이 되지 않는 마당에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서두를 마음은 없었다.
원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해서 '녀석들'의 성향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인도의 1호 스타벅스라는 타지마할 호텔 점에서 만났던, 가장 처음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바룬이라는 녀석은 쇼핑을 같이 다니자고 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쇼핑을 다녔다.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골반뼈가 아파올 정도였다. 둘 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겐 아픈 골반뼈의 기억이고, 그는 뭔가 자신이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서로가 뭔가 맞지 않다는 걸 골반 뼈의 통증만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관광가이드 삼아 당장 한국에 가서 맛있는 한국 음식을 실컷 먹고 오자는 녀석도 있고,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남이 여주에게 해주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변신 놀이 해보자는 녀석도 있었다. 비행기 1등석보다 화려한 최고급 메르세데스 벤츠 사장석에 누워 케이팝 음악을 같이 듣자던 녀석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한국의 경제와 문화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 달라는 공부벌레 타입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별의별 인간들을 다 만났지만, 그 별의별 군상들의 공통점은 결국 다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자기들 내면의 비어있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내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뭔가 나에게서 하나라도 얻어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저 스타벅스 문 밖에서 일어나는 호객행위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쪽이 훨씬 더 안전하게 느껴지긴 했다.
생각해 보면, 아난트도 나에게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고, 그다음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새로운 이야기 또 해 줄 게 있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모으는 놈일까. 작가가 되려는 의도를 가진 녀석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한 인간의 성향이나 꿈에 대한 그림 또한 내가 굳이 정확히 그릴 필요가 없기에 그의 의도에 관해 일어나는 상념들을 나는 바로 잠재워 버렸다. 또한 내가 그들에게서 얻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서로 피장파장의 '관종 호객 라이프'라, 누가 뭘 더 얻고 요구하는지 따질 필요도 없지 싶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이건 언젠가 '자기 글이 만드는 힘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되고 싶은 목표를 가진 내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작가란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좋은 작가가 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아난트를 다섯 번씩이나 만나고 있는 건, 내가 정말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것, 내가 줄 수 있기를 원하는 무엇을 요구한 사람은 아난트가 처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내 주머니 안에 나만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시작할 수 있을까. 시작해도 될까.
대문 사진 출처: https://www.chuzailiving.com/starbucks-coffee-in-horniman-circle-mumb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