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따라오라고 내가 말하긴 했지만, 내가 그를 따라가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커피점을 나서기 전에 아난트가 건네주는 검은 헬멧과 검은 라이더 재킷을 받아 착용하고, 내 소지품들은 그가 건네는 명품 로고가 선명한 부드러운 갈색 가죽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아난트가 내 소지품이 든 가방을 제 오토바이 트렁크에 넣고 문을 닫으니 저절로 달칵하고 잠기는 소리가 났다.
검은 폭주족 차림의 아난트와 나는 마치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나들이 나온 발리우드 배우 커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실제로 이곳은 연예인들이 고급차를 끌고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 지역이어서,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딱 보기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오토바이에 오르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연예인들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무엇이라 여기든,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 순간이, '녀석들'을 만나며 가장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잠시 내가 이 세상 중심이 된 듯한 기분. 모두가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기분. 모두 위에 군림하는 뭐라도 된 듯한 특별한 기분. 서열주의 관종 쓰레기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감. 완벽한 자아도취.
스스로를 쓰레기로 여기는 김에, 지금 여기가 압구정 로데오 거리 한복판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아무나 탈 수 없는 몇 억대 초명품 바이크에 올라탄 8등신 모델 못지않은 인도 이민호의 자태,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존재, 이 찬란한 순간을 잠시 소유한 나!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매의 눈을 가진, 미적 감각, 평가 잣대가 하늘 끝에 붙은 까다로운 한국 사람들이 필요하다. 먹기 힘든 한국인의 관심과 선망엔 톡 쏘는 시원하고 짜릿한 맛이 있다. 지금 그 맛이 몹시 당기는 나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 한국인 관광객 몇 명이라도 제발 섞여있기를 바란다.
관종은 시선에 대한 욕구만큼 대범해질 수 있다.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줘!"
나는 보란 듯이 아난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넓은 등에 기대 눈을 감는다. 아난트가 엔진을 켜자 바이크가 살아나는 감각이 온몸을 부르르 떨게 만든다. 기계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도 내가 타고 있는 이 기계가 엄청난 힘과 속도를 가진, 그리고 동시에 아주 부드러운 감성을 가진 대단히 매력적인 놈인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부웅하고 출발하는 순간, 나는 하늘에 솟아 오른 듯, 나의 모든 결핍이 꽉 채워지는 것 같은 절정의 쾌감에 가까운 만족감을 느낀다. 한동안은 올라가기만 할 것이다.
***
"이 정도면 어때요, 충분히 높아요? 이 건물은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타워예요. 여긴 최고층은 아니고, 우리 머리 위로 4층 더 있어요."
순간, 나는 혹시 오는 길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천국에서나 펼쳐질 것 같은 럭셔리. 럭셔리 중의 럭셔리.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친 럭셔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끓어오르는 극도의 낯선 이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극을 해야 할 때 자신의 쉽게 위축되는 본성을 누르기 위해 '다 좁밥이야' 생각을 한다는 어느 개그우먼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그 개그우먼의 노하우가 나에게도 필요하다. 다 사람 사는 데야. 인간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 봤자, 집인데. 밥 먹고 똥 싸고 누워 자는 것 밖에 더 하겠어. 다 좁밥이야.
마음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방금 전 초명품 바이크 맛을 그대로 느낀, 모두가 좁밥인 걸 이해 못 하는 다리가 달달 떨려왔다. 표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꾸 무언가가 숨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보다 현실적인 공간, 모두가 똥을 싸는 공간 같은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 화장실 좀..."
내가 말을 뱉자마자, 아난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에 뜬 이름을 보는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날 위해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창한 힌디어로 전화를 받았다. 힌디어를 말하는 아난트는 또 다른 사람 같다고 느끼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아... 씨ㅂ..."
화장실은 더 미쳤다. 감당하기 힘든 공간의 압력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들었건만, 화장실은 화장실대로 금으로 사방을 바르고 각종 보석을 화장실에 붙여 숨겨두기로 한 듯 번쩍거리기가 알리바바의 보석 동굴이 이런 느낌일까 싶다. 나는 일단 물을 틀어 그나마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수돗물 소리에 의지하며, 숨을 몰아 쉬었다.
'아무나 높은 데 올라오는 게 아니네. 이런 공간을 감당할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게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들자, 창백한 얼굴의 동양 여자가 앞에서 난감한 것도 같고 비루한 것도 같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화장을 고치려고 가방을 찾다가, 바이크 트렁크 안에서 가방을 꺼내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너무 생소한 환경으로 진입하여 정신이 나간 것이다. '정신 차리자!' 나는 차가운 손바닥을 볼에 대고 탁탁 두드린 후, 모자를 벗고, 머리 밑에 손가락을 넣어 머리카락을 부풀리며 매만졌다.
화장실에서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가니, 아난트의 부름을 받은 누군가가 갈색 가방을 갖다 놓고, 그 뒤를 이어 누군가 호텔 룸서비스에나 사용될 법한 음식 카트를 끌고 들어온다. 아난트가 힌디어로 지시하자, 각기 다른 목적으로 온 듯한 두 사람이 함께 창가에 있던 데이베드와 화분들을 들어 카우치 옆 공간에 밀어붙이고, 다이닝 룸의 식탁 테이블을 힘겹게 들고 와 데이베드가 있던 창가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러고 나서 카트 위 음식과 음료수들을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두 사람은 뭐 더 시킬 건 없는지 민첩한 태도로 아난트의 눈치를 살핀다. 아난트가 이제 됐다는 듯한 손짓을 하자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문이 찰칵 잠기는 소리를 낸다.
"여기 와 봐요. 정말 높다는 걸 느낄 거예요."
"그러네. 정말 높다."
"아까 온 전화 어머니였어요."
그가 내뱉은 '마더'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당황스러운 감정들. 처음에 물어봤야 했을 걸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근데, 여기가 어디야? 혹시 너희 집이야?"
"이 건물 전체가 우리 집안 건물이에요. 말해줬잖아요.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아...!"
첫날 스타벅스를 나와 주후해변을 걸어 다니며, 그가 가리켰던 건물이 이곳임이, 그의 말들이 사실임이, '녀석들'이 하는 말들이 다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한 순간에 입증되었다.
"이 건물 꼭대기층은 가족 전용 스카이라운지 층이고요, 그 아래층에 부모님 층, 그 아래 큰 형 층, 작은 형 층, 그리고 여긴 내 층이에요. 내가 집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엄마에게 연락이 가거든요. 사실.. 낮에 여자와 집에 들어오는 일은 처음이라... 엄마가 좀 놀라셨어요."
아난트는 여자라는 뜻의 '워먼'이라는 단어를 꾹꾹 돌다리를 밟듯 조심스럽게 발음했다. 그의 어머니가 놀란 건 '근본을 모르는 외국인 여자'를 집안에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날 집으로 데려왔어? 근처에 일반인 스카이라운지 카페 같은 곳 없어?"
"정말 여기가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고, 내가 잘 아는 가장 높은 곳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상하게 당신에겐 다 보여주고 싶어져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멋쩍어하며 시선을 돌리는 아난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아니 그가 나로 하여금 선을 넘어 이 공간에 들어오게 한 사실 자체에 내가 불안해졌다. 남편이 결혼할 때 나를 지켜주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아들이 여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만큼 그 어머니는 아들이 채워주어야 하는 여자의 결핍을 경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누가 뭘 해 주고 싶다 하는 말을 덥석 받을 수 있는 여자는, 아직 그런 경멸을 가슴 찢어지게 겪어보지 못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들 뿐이다. 어리지도 않고 순진한 아가씨도 아닌 나는 정확한 계산 없이 결핍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계산을 제대로 못하는 치기 어린 호의를 덥석 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의 말을 무시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듯, 나는 대꾸 없이 창 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돌린다.
한쪽으로는 뭄바이 시내 전경이, 다른 한쪽으로는 아라비아해가 훤하게 펼쳐져 있었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뭄바이 거리에 자욱한 뿌연 연기도, 타는 냄새도 없는 맑은 오전 햇살이 더없이 따사롭고 유쾌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마음은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놀라셨다면서… 우리 그냥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