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내 초년 인생이 친척들 눈치 보며 힘들긴 했어도, 생각해 보면 내리막 길은 아니었다. 부모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는 결핍이 서러워서, 욕을 먹어도 싼 이기적인 엄마에 대한 욕이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와서,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예민한 사춘기 여학생의 감정을 품어줄 내 방이 없어서,... 나 때문에, 남들만큼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힘든 것이었지, 생각해 보면 친척들은 나름 최선을 다 해서 나를 거두었다. 내가 대학에 턱 하니 붙어 등록금 고지서를 내밀었을 때도, 아무도 네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고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딸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괜찮은' 대학에 붙었는데도 한 번 찾아와 용돈이라도 줄 마음이 없는 엄마만 '들어도 싼' 욕을 먹었다. 고모네와 작은 아버지네가 돈을 거두어 내 등록금과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마련해 주었을 때 나는 정말 감동을 받았다. 이게 마지막 금전적 도움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런 단호함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는 '지 엄마도 외면하는 한 다리 건너' 자식에게 이만큼도 해줄 자신이 없다. 그 마지막 감동의 순간 덕분에, 나는 친척 어른들이 자기들 자식부터 우선으로 챙기는 모든 순간에 느꼈던 서러움을 모두 털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친척집을 떠날 수 있었다.
사실 나도 내 상황에 맞춰 대학을 가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과수석을 노리고 선망하던 간판을 내려놓고, 많이 낮추어서 지원했다. 하지만 세상엔 장학금 받고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가난한 천재들이 넘쳐나는 모양인지, 과수석은커녕 차석도 되지 못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도 못 받게 된 상황이 시작부터 제대로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입안에서 검게 탄 맛이 가시지 않는 답답함을 그때 처음 느껴보았다.
그때 차라리 학교 앞 어느 식당이나 술집에서 알바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친척들이 마련해 준 돈으로 미용이나 제빵 같은 기술을 배웠더라면 하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기도 했었다. 나는 왜 그때 남규식 교수를 찾아갔을까. 내가 좋아하는 문체를 구사하는 유명 작가라는 사실이, 성에 차지 않은 학교를 빛내는 단 하나 보물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마녀의 과자집 사탕 창문처럼, 작가가 꿈인, 다른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린 여자를 유혹했다. 생각해 보면 첫인상부터 그는 결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가 있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테니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 달라는 어린 여자의 호소에 그는 조롱하듯 빙글거리며 이렇게 답했었다.
"개나 소나 대학을 가야 한다고 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야. 이래서 귀족들만 대학을 다니는 귀족 사회가 부활되어야 한다는 거지."
그때의 나는 그의 말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 귀를 막았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가진, 성공한 그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마음을 상하지 않겠노라고, 그를 혐오하지 않겠노라고 마음이 억지를 부렸다. 나를 속이고 사는 시간의 시작. 진짜 내리막길은 그때부터였다. 악마는 누가 잃어버린 지갑을 낚아채듯 내 영혼을 빨아들였다. 흡족해진 그는 내게 곳곳에서 쉽게 청탁받는 신문 칼럼이나, 잡지 에세이 같은 일감들을 던져 주었다. 그가 전략을 지시해 주는 대로 단편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 등단을 하고부터는 자서전을 대필해 줄 작가를 찾는 기업가들이나 유명인사들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삶에 여유가 넘치는 고객들 모두 글 값을 후하게 쳐주어서, 학비와 생활비 두 마리 토끼가 다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만드는 술자리마다 불려 나가야 했다.
아직 양심이 말랑하던 시절, 나는 자괴감이 극도에 달할 때마다 내 목을 조르는 대신, 내 살을 지지고 팠다. 어깨에서 시작한 문신이 손까지 내려오고, 오른쪽 귀에 6개, 왼쪽 귀에 4개의 구멍까지 뚫고 나니, 다행히 양심이 겨울 바닷바람에 제대로 잘 말린 동해안 오징어처럼 뻣뻣하게 말라 굳어 감각이 없어졌다.
남편에겐 내가 첫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겐 유리라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사실 그 아이를 키워야 했으면 거두었을 것이었다. 양심이 죽은 주제에, '지 엄마도 외면하는 자식'에 대한 연민은 생뚱맞게 살아 있었다. 하지만, 긴소매로도 숨겨지지 않는 내 손등의 문신을 본 그의 어머니는 잠재적 아동 학대범이라도 마주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애는 당신이 전적으로 맡아 키울 테니, 혼인 신고는 하지 말고 일단 그냥 둘이 같이 살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 순간 알았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내가 잠시 살다 나가떨어지는 것임을.
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결핍감에 실패감까지 더하지 않으려는 승부욕이 있다. 나는 사실 세상에 화가 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거부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내가 세상에 대해 가진 모든 승부욕과 분노가 집중되었다. 대놓고 싸움을 걸진 않았지만, 남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버티는 것으로 그의 어머니와의 싸움을 이어갔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맞서는 성향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맞설 수 있는 남자였다면 첫 부인과 이혼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내 친척들 눈치를 봐서 조촐히 결혼식만 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로 7년을 흘러가게 했고, 어머니가 모든 것을 간섭하고 진두지휘하게 그대로 두었다.
결국 그의 어머니가 다시 나섰다. 7년을 괴롭혀도 떨어져 나가지 않자, 내가 아기를 낳아 대를 이을 마음이 없다는 죄목을 대며, 어머니 쪽에서 더 거센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남의 집 대 끊고 망칠 생각이 아니라면 떠나 달라고 강경하게 말했다가, 아직 젊어 어디서든 일어설 수 있을 테니, 아들을 놓아 달라고 간청하듯 부드럽게 말하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압박을 가해왔다. 내가 남편에게 말도 전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다음 차례로 아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막 40이 된 그 아들은 그제사 사춘기 때도 못해 본 반항을 뒤늦게 시작했다. 7년 동안 나서지 않던 혼인 신고를 해 버리고, 해외 주재원 자리가 났을 때 얼른 신청을 해 버리는 것으로 그는 어머니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기며 사십춘기를 부렸다.
그는 사실 나름 오래 어머니의 영향권에서 떠날 준비를 한 것이었다고 했다. 인도에 한국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는 움직임을 보면서, 곧 해외 주재원 자리가 많이 날 것을 예상하고 마음이 끌리던 차에 어머니의 과한 압박이 시기를 조금 당겨준 것이라고 했다.
뭄바이에 오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와 헤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나의 관종 본성이, 나에게 관심이 옅어져 가는 남편을 느끼면서 지쳐가고 있었다. 또한 나는 버림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내가 먼저 몰래 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남편을 깨끗이 버릴 수 있으려면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문제는 가진 기술도, 타고난 열망도 글 쓰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한 번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게 어렵지, 두 번째 미끄러짐은 그냥 순식간에 지렁이가 제 집을 찾아 땅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처럼 쉽다. 나는 이미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남규식이라는 진흙탕에 다시 발을 넣고 있었다. 글을 팔 수 있으려면 그를 통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다.
"왜, 형편이 또 어려워졌어? 근데 너 얼굴은 더 예뻐졌다!"
남규식은 제 앞에 수년 만에 다시 나타난 나에게 변함없이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치 떨리게 싫었지만, 징그럽게 익숙했다. 그는 손쉽게 내 글들을 돈으로 바꿔주었다. 이젠 내가 대학 신입생이 아닌 경력 작가이다 보니, 대필 알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일거리들도 물어다 주었다. 내 이름을 걸고 쓰는 신문 칼럼과 여행 에세이, 주부 잡지에 소설 연재 기회들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학생 때처럼 밤 시간에 나올 수 없는 유부녀인 것을 고려해서, 그는 낮에 나를 불러냈다. 그가 글을 쓰는데 영감을 주는 '뮤즈' 역할을 맡긴다고 했다. 낮과 밤의 세계가 서로 등을 돌리는 공존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를 버리는 대신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뭄바이행을 택한 남편에게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를 쓰레기 취급하는 그의 어머니를 더 일찍 적극적으로 막아주지 않은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은 쉽게 흩어졌다. 이미 양심은 굳어 붙어 다시 살아난 적이 없었기에 모든 감정처리가 수월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인생의 뒷면은 당연히 있는 것이고, 당연히 있는 것에 대해 마음을 크게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잘 됐네. 좋은 여행 에세이 많이 나오겠어. 기회 되면 내가 한 번 찾아갈 게."
뭄바이로 가게 되었다고 알렸을 때, 남규식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공존 관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는 낡고 낡은 인간은 한 번도 내 결혼생활을 방해하려 든 적이 없긴 했지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먼 여행을 가는 '자신에게 종속된' 뮤즈를 그리 쿨하게 놔주어 사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나는 뭄바이에 가서도 글을 쓸 수 있어야만 했기에 마지막까지 그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뒤에서 일감을 끊어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내가 말없이 결혼하고 잠적했을 때 그가 내 글 세계 인맥과 일감을 다 끊어 버린 참담한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가만히 다 들어줄 수 있다는 아난트라도, 바닥이어도 너무 바닥인 내 삶을 그에게 털어놓을 순 없다. 아직도 끝없이 내려가고 있는 불안정한 내 삶에 엮여 함께 추락하는 경험까지 주는 건, 높고 안정적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다. 또한 나는 내 낮의 일상을 지배하는 남규식을 잠시라도 잊고 싶어서 '녀석들'과 놀았던 것인데, 남규식의 이야기를 아난트와 나누어야 한다면, 내 휴식 시간까지 남규식 생각으로 오염시키는 셈이다. 그건 나에게도 예의가 아닐 것이다.
남규식은 나를 풀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뭄바이에 간다는 이야기에 영감이 와서 뭄바이를 배경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자료수집'을 맡기겠다고 했다. 나를 이용하는 방식을 비대면 방식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사진과 영상을 요구했다. '뭄바이 거리 풍경'같은 ‘무난한’ 주제나, '인도 몬순 비에 푹 젖은 모습' 혹은, '인도 전통 옷을 입은 모습'과 같은 '그나마 참아 줄 만한' 주제를 던지기도 했지만, 때론 특정 신체 부위를 원하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주제를 던지기도 했다. 물론 사진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선택권조차 없는 노예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보내지 않으면 대한민국에서 내 글 장사는 끝난다. 글 장사를 그만두기엔 내 처지가 너무 불안정하다는 게 문제다. 내 삶이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얼마나 더 나를 속이고 팔아야 하는지.
집 앞에 거의 도착해 릭샤에서 내리려는 순간, 문자가 왔다는 짧은 전화기 진동음이 울리고, 나는 언제나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몸이 짐작한 대로 남규식이다.
[뭄바이 소설 출판 계약 완료. 소설 수정은 내가 직접 뭄바이로 가서 현장감을 느끼면서 하려고. 한 달 정도 머무를 예정. 2년 만의 재회인가! 기대된다 정말!]
대낮인데 눈앞이 깜깜해진다.
"Are you okay?"
릭샤에서 내릴 생각을 않고 한참을 그대로 있으니, 운전기사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물어본다.
"I'm not okay!"
내내 참고 참았던 울음이 처음 보는 운전기사 앞에서 터져 버린다. 아무에게나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 이렇게나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운전기사 앞이라 다행이다. 그에게는 팁만 조금 더 얹어 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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