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냉장고를 뒤지면서, 아니샤에게 오늘은 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넣었다. 아니샤에게 전적으로 먹거리를 의존하고 있으니, 냉장고엔 달걀과 우유, 몇 가지 과일과 야채뿐, 쓸만한 한식 식재료가 없다. 다행히 냉동실에 한 달 전에 고모가 설이라고 부쳐 준 국멸치와 김, 밀봉된 떡국떡이 포장도 뜯지 않은 그대로 들어있었다. 냉동실 한구석에서 스테이크용 고기 한 덩어리도 찾았다. 고기와 떡을 물에 담가 두고 나는 오랜만에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욕조 가득 물을 받아 놓고 들어앉아 눈물이 나오는 만큼 실컷 울어보라고 내버려 두었다.
눈물샘이 진정을 하고 마음이 가라앉으니, 서서히 아난트에게 들은 이야기에 관한 말들이 떠오른다. 정말 이야기가 그렇게 사람 인생을 바꿀 힘을 가질 수 있는 거라면, 제발 나를 구원해 줄 이야기 좀 찾고 싶다. 내가 책을 적게 읽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파워풀'한 이야기를 발견한 적이 없는 걸까. 왜 내 주변 어른들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찾아 봐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모두가 나를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두는 걸까. 왜 다들 그 모양 그 꼴로들 살아가는 걸까.
하긴 나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거나 내 삶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세상 앞에
내 고민을 털어놓고 호소한 것이 남규식이 었는데, 그 세상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겪고부터 나는
결코 다신 세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내가 작가라는 것을
인정받고, 내 삶을 증명하고 관심을 얻어내고 싶은 욕구에만 휩쓸려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주린 상태라,
항상 너무 급한 결정을 내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너무 배가 고파 급한 대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뭄바이 길거리의 소와 개와 고양이들처럼, 나도 급한 대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주변엔 쓰레기들만, 쓰레기 같은 이야기들만 가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석만 차곡차곡 모아 온 듯한 아난트의 삶과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내 삶이 너무나 대조가 된다. 보석이
많아지면 뭐가 그리 문제겠는가. 누가 훔쳐 갈까봐 걱정이 되지 않는 정도로만 삶을 잘 관리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 더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겐 미니멀리즘이 인생의 돌파구로 다가온다. 쓰레기를 치우고
싶다는 의욕을 불어넣어 준다. 그나마 미니멀리즘이 지금 내가 가진 가장 파워풀하고 유익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 덜어내야 할 쓰레기, 쓰레기 중 쓰레기는 남규식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쓰레기를 함부로 버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 쓰레기가 내게 가장 중요한 '작가' 커리어를 움켜쥐고 있다. 남규식을 버리면, 내가 내 생계를 책임질 길이 막힌다. 남편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시어머니가 기생충 취급하며 휘두르는 모욕의 칼에 찔리며 느낀 그 비참한 감정들을 결코 다시 삶에 불러들이고 싶지가 않다. 아픈 것보다는 더러운 쓰레기 더미가 낫다.
서로 꼬리를 물고 도는 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이 답답하여, 물속으로 머리를 푹 집어넣었다. 발이 물밖로 쑥 나오면서 욕조 끝에 세워져 있던 샴푸와 비누 등을 차 버리는 바람에 그것들이 넘어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욕실을 울린다. 나중에 주워 정리하면 될 일이다. 물 안에서 퉁퉁 부은 눈을 떠 깜박거려 보았다.
"은수야!"
물 너머로 벌컥 욕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실루엣이 뛰어 들어와 내 이름을 부르며 세상이 꺼지기라도 하는 듯한 괴성을 지른다. 나는 나대로 놀라, 물속에서 당황하여 허우적대며 좀처럼 몸을 세우질 못한다. 그 실루엣이 옷을 입은 채로 물속으로 두 팔을 푹 넣자, 그제사 내 몸이 바로 세워진다.
"야, 너 괜찮아? 살았어? 살았으면 대답해 봐, 제발!”
얼굴과 머리에서 물기를 쓸어내며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가관이다. 양복 입은 중년 아저씨가 욕실바닥에 철퍼덕 앉아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소매에 김서린 안경을 묻고 엉엉 울고 있다.
"내가 인생 참 잘못 살았나 봐..."
사십춘기 남자의 통곡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찢는 효과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다.
남편도 나도 오늘 무슨 날인 모양이다. 둘 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게 이해되지 않는 시간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서로 아무 말 없이 병든 닭처럼 누워있다가, 어둠이 내리는 걸 보고 저녁을 짓기 시작한다. 떡국밖에 없는 조촐한 식탁을 차리고 조용히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각자의 그릇에 담긴 떡국에서 떡을 하나씩 건져 각자의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기를 반복한다.
남편의 표정은 계속 어둡다. 오늘 뭔가 엎친데 덮친 일이 있는 모양인가. 뭔가 말을 망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싸하다.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떡국을 치우고, 찬장 한 구석에 아껴두었던 한국 소주 한 병을 가져와 컵에 따라 주는 것을 받고서야, 남편이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될 대로 되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며칠 한국에 혼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혹시 어머니가 아프셔?"
"아니, 그건 아닌데, 유리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는 모양이야. 더 이상 할머니하고 안 살고 싶다고, 아빠한테 갈 거라고 인도에 가게 해 달라고 난리를 피웠대. 애가 가출도 하고, 불량한 애들하고도 어울리고, 술도 마시고 난리도 아닌가 봐. 아무래도 내가 가서 애를 좀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아빠 노릇 제대로 한 적도 없어서... 내가 간다고 뭐가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살아온 것에 뒤늦은 자괴감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컵에 따른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난감해 죽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쉰다.
"난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되는 건 줄 알았거든. 그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시키는 대로 살라고 하는 엄마가 없었으니 남편의 딜레마를 공감할 수 없다. 서로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고 해 줄 말도 없으니, 지금까지 서로의 말들이 서로의 귓등으로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오늘은 그의 우는 모습까지 보고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역시 각자의 고민은 다르고 나는 해줄 말이 없다. 자식의 삶에 엄마라는 존재의 자리가 너무 지나치게 커도 문제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어쩌면 옳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어머니가 설정한 이야기들이 결국 그의 삶을 쓰레기로 몰고 가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였을 수도.
"그래도 내가 아빠니까... 걔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라도 사 가지고 가서 잘 달래 봐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나는 그의 무력한 태도가 이제 지겹다.
"뭐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나도 모르게 강한 어조로 말이 튀어나온다. 남편은 40 넘어 첨 듣는 호통에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가서, 여권 만들고, 유리 여기서 학교 다닐 수 있게 학교 옮기는 수속 다 밟고, 다 정리하고 애 잘 데리고 들어와."
나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에 한 번도 꺼내지는 못했지만,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던 말을 쏟아
놓곤, 곧장 일어서 등 돌리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긴 건 아니지만, 오래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뱉고 나니 뭔가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원한 감정이다.
남편은 말없이 내 등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혼자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앓고 있는 유리를 데려와서 함께 사는 그림이 어떨 것인지 그려 보느라 마음이 바빠졌을 것이다. 비교적 행동 패턴이 단순한 '모범생 어른이'와 함께 10년을 살고 나면, 그 사람의 생각이 굴러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너무 잘 들리는 게 부담스러울 것 같아 등이라도 돌려 둔 참이다.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내 생각을 내 심정을 결코 파악할 수 없어서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저가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유리를 데려 올 것이다. 자기 피붙이 딸도 챙기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저 쓰레기부터 치우자고 나는 마음먹는다. 자기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부모를 미워하는 내 감정이 사춘기 시절 느꼈던 그대로의 크기로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문득 발견한다.
대문이미지 출처: Pixabay (by Engin_Akyu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