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트온 Dec 24. 2023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도시에서 (2)

[소설] 뭄바이의 북극여우 

나의 사춘기는 내 속에서만 부글거리는 마그마였다. 뜨거운 감자를 다섯 개쯤 맨손으로 들고, 하나라도 땅에 떨어뜨릴까 전전긍긍하며 발악하며 버티고 걸어가는 모습. 그게 나였다. 밖으로 쏟아낼 길이 차단된 사람들만이 결국 진정한 글의 구원을 입고 글의 천국으로 진입하는 법이다. 하지만 글의 문제는 내가 외국어를 구사하지 않는 이상, 발견되는 순간 해석이 가능한 형체라는 것이다. 학교 수업 노트인 척 가장해서 가방 깊숙이 넣고 다니다가, 그마저도 불안해지면 나는 내 일상의 감정이 뜨겁게 끓고 있는 그 노트들을 불태워 버리곤 했다. 내 사춘기는 그렇게 간첩 생활이었고, 뭐든지 혼자 몰래 살금살금 처리하는 그 간첩질 습관이 아직도 나를 옭아맨다.


유리의 사춘기는 아마도 글 세계보다는 우정의 세계로 진입한 게 아닐까 싶다. 가출하고 술 마시고 불량스러운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말은 달리 해석하면, 그녀를 재워주고 함께 술 마셔 주는 그런  친구를 만들고, 강박적인 할머니의 간섭과 공부 압박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런 그녀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깐깐한 완벽주의 할머니가 제한하는 틀을 벗어나기 위해 제 딴엔 얼마나 부딪쳐보고 머리를 굴리고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을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이 두려운 어른이 될 것이다. 어머니가 저를 버렸다는 사실에 체하고 또 체하다 아프지 않고 소화해 내는 법을 조금씩 익혀갈 것이다.


그래도 생계의 위협 없이 공부를 실컷 하게 지원해 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들 것이다. 유리는 나와 달리 탄탄대로를 달리며 결국 잘 자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유리가 이리저리 튕기는 고무공같이 굴 거라는 건 각오하고 있다. 그 통통 튀는 야생마가 내 두려움과 불안을 좀 잊게 해 주면 좋겠다. 나는 사실 날 정신없게 폭풍처럼 몰아쳐 줄 아이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임신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한 이상 생각에서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임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애 만드는 공장인 듯, 눈만 마주치면 물어보는 것이, '너흰 애는 언제 가지냐'. 지겹도록 들으며 지겹도록 생각해 봤다. 결혼을 '아기 공장'으로 친다면, 내 결혼은 확신 없는 임원진의 미적거리는 태도로 아직 뭘 만들지 결정을 못해 전기세와 건물 자리만 낭비하고 있는 공장쯤 된달까. 아무도 권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임신을 내가 나서서 진행시킬 만큼 확신이 없었다. 


유리와 나는 어떤 관계가 될까. 필요하면 취하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도시의 관계가 될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가족... 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다.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가족이었던 기억이 아버지 말곤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세상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어린 날의 좋았던 기억들을 거듭 곱씹으며, 아버지만이라도 진정한 가족이었다고 붙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런 생각들을 그만하기로 한다. 생각한다고 임신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고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늘은 오늘 하루만 생각하자. 사실 오늘은 기분도 컨디션도 썩 괜찮은 편이다. 어제 아난트를 만나고 뭔가 진단을 받고 처방전까지 받은 듯한 푸근한 마음이 들면서, 지난밤 그동안 밀린 잠까지 푹 잘 수 있었다. 남규식은 여전히 내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있지만,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하자 싶은 뭔가 느긋한 마음이 들면서, 오늘 유리와 남편을 만나러 공항으로 오는 발걸음도 나름 신나고 가벼웠다. 


다시 봐도 뭄바이 국제공항은 하나의 예술작품 그 자체다. 뭄바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 상상했던 인도적 풍경이 아닌, 하얀 미래도시 같은 공항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많은 최첨단 기술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완벽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건축 기술도 내겐 참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남편은 택시 타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마중을 나가고 싶었다. 나는 몸을 움직여 할 일이 필요했다. 남편이 없는 일주일 동안 차고에 꼼짝 안고 쉬고 있던 남편 출퇴근 전용 SUV를 출동시켰다. 나는 인도 시내를 돌아다닐 때 릭샤를 이용하는 편이고 운전을 해 본 지가 오래돼서 조금 낯설었지만, 운전 자체를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라, 금방 운전이 편안해졌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전광판 지시를 따라, 오후 2시 한국발 비행기가 도착하는 게이트 앞으로 갔다. 한국에서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인도인들과 한국인들이 제법 있어, 나도 그 틈에 끼어 서며 가방에서 전화기부터 꺼내 확인했다. 


두 개의 문자가 와 있다.


[나 지금 막 뭄바이 도착했다!]

[도착했어. 지금 공항에 있어?]


먼저 온 문자 한 통이 남규식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 뜨릴 뻔했다. 문자가 온 시간을 보니, 10분 전이다. 지금 어디까지 나온 걸까. 남편의 문자에 답을 해 줘야 하는데 손이 떨려서 문자를 할 수가 없다.


어떡하지? 뭐라고 답을 하고 이 상황을 모면하지? 일단 화장실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싶어 등을 돌리는데, 안타깝게도 남규식의 목소리가 이미 여기 와 있다. 


"은수니?"


너무 늦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문자를 확인했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전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광대뼈를 밀어 올려 억지웃음을 만들고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한다. 


"지금 도착하셨어요?"

"어? 어떻게 벌써 왔어?"


그의 등 뒤로 게이트 쪽을 보니, 남편이 유리와 함께 저쪽에서 걸어오며 손을 흔든다. 내가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자, 남규식이 흘깃 뒤돌아 보곤, 표정을 굳히며 낮게 읊조린다.  


"날 마중 나온 게 아니라, 우연의 일치 구만."


남규식은 영악한 머리로 사태 파악을 정확하게 해낸다. 나는 못 들은 척, 남편과 유리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가족이 절대 우선이라는 룰은 남규식이 만든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이 나타나면 뮤즈는 연기처럼 사라져 주는 거라고 그가 정했다. 


곁눈으로 보니, 그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가, 뭔가 아쉽다는 듯 몇 발자국 거리에 멈춰 서 있다. 아무래도 나만 믿고 아무 준비 없이 온 것 같다. 분명 뭄바이에 대한 어떤 사전조사도 없이, 자기 소설 속 뭄바이에 빠져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선택을 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꼬박꼬박 성실히 제 요구에 답을 해 주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인간으로 길들이는 데 한몫을 한 내가 잘 안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쓸 새가 없다. 남편과 유리가 코 앞까지 왔다.  


"뭐 하러 나왔어. 택시 타고 간다니까."

"유리야, 반갑다. 많이 컸네!"


나는 구시렁거리는 남편을 무시하고, 유리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넨다. 유리는 대답 없이 탐색하듯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못 본 사이 키가 많이 자랐다. 키도 크고, 숱 많은 머리를 길게 길러서 그런지, 몇 년 전에 본 모습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나는 조금 당황한다. 처음 만나는 낯선 아가씨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저기요."


나는 '내 사람들'의 틈을 파고 들어오는 남규식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혹시 이은수 작가님 아니세요?"

"네?"


이 미친 새끼가. 무슨 수작인 걸까. 남편이 안경을 고쳐 쓴다. 경계심이 들 때 하는 행동이다. 내 글에 관심이 없는 만큼, 나를 길에서 알아볼 구독자 따위는 있을 리 없는 '이름 없는 작가'라는 걸 남편은 잘 안다. 남편이 예의 주시하는 레이저가 느껴질 정도다.


"제가 즐겨 읽는 여행 에세이 작가님 같아서요."

"아.. 네..."


도무지 어떤 식으로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지 몰라, 말을 얼버무리기만 한다.


"가족이신가 봐요. 이렇게 큰 따님도 있으시네요! 엄마 닮아 정말 미인이네요!"


남규식은 내가 자식을 낳은 적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남편에게 전처가 있었고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데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싶다. 넘겨짚어 상황판단을 해보려는 것일 게다. 설마 이게 궁금해서 사라지지 못한 걸까.


이런 넘겨짚기를 처음 당해 보는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하나같이 말이 없다. 그나마 사회생활에 단련된 남편이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선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 아내가 유명한 작가는 아닌데, 아시는 거 보니 독서 많이 하시는 분이신가 봐요.”

"네. 좀 읽는 편입니다. 이은수 작가님 글이 참 좋아요. 제가 이은수 작가님 여행 에세이를 읽다가, 너무 좋아 보여서 뭄바이에 놀러 오기로 결정했는데, 막상 와 보니 막막하네요."

"인도 여행 처음이세요?"

"네."

"호텔은 잡으셨어요?"

"네, 여기 타지마할 호텔이 유명하대서 거길 잡아놓긴 했는데..."


남편은 인도 여행이 처음이란 말에 연민이 확 올라오는 얼굴이다. 자기가 처음 인도 왔을 때 바가지 쓰고 고생한 기억이 많아서 처음 인도에 왔다는 한국 사람만 보면 오지랖을 떠는 편이다.


"여기 처음 오면 바가지 엄청 당해요. 흥정을 좀 하셔야 하는데, 영어는 편하신가요?"

"애석하게도 영어가 안 편하네요... 제가 무슨 생각으로 뭄바이에 왔는지 모르겠네요. 에세이만 읽고 들떠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요."


미국에 가까운 친척이 있어 어릴 때부터 들락거려 영어가 몹시 편한 남규식이 허튼수작을 하고 있는 게 가증스럽다.


"저 아저씨 아까 비행기 안에서 보니까 영어 잘하던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유리가 아이답게 솔직하고 거침없이 끼어든다.


"아저씨 비행기 안에서 봤구나? 그게 비행기 영어만 겨우 책 보고 하는 거지."

"아니던데. 미국 교포 수준이던데. 제가 영어는 못해도, 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많아서 영어 발음 들으면 좀 알거든요?"


유리가 이렇게 낯선 성인 남자에게 맞설 만큼 대범하구나 나는 속으로 감탄한다.


"유리야. 너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끼어드는 거 아니야."


남편은 유리가 얼마나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혼자 민망해하며 어쭙잖은 훈계를 늘어놓는다.


"어른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들이야. 거짓말하다 들키면 어른이 말씀하신대. 쳇"


어린애가 어찌 이리 통찰력이 있을까. 유리의 말이 최근 들어 본 중 최고의 명언이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요새 사춘기가 와서..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보, 당신 글 때문에 뭄바이 오셨다는 독자님인데. 고생하시게 하지 말고 타지마할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자."


무리수를 두고 원하는 걸 이끌어 낸, 남규식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나를 노예로 보는 걸 넘어서서 '내 사람들'까지 무시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 내 기분은 몹시 더러워진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남규식과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든다. 남편은 한 번 안면을 트면 한없이 친근하게 굴 수 있는 인간이고, 남규식은 태생이 가식 그 자체라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변신이 가능하니 끝없이 쿵짝이 이어진다. 유리는 거짓말을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어가는 어른들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지만, 어른들의 결정이라니 금방 체념하고 따라온다. 


유리는 내 곁에 와서 함께 걷는다곤 할 수 없지만, 어느새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다가와 있다. 


"뭐라고 불러드려요?"


아이가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글쎄. 네가 편한 대로 불러."

"아빠가 '엄마'라고 부르라는데... 엄마라고 부르는 건 지금 안 내켜요..."

"그건 좀 그렇지."


속에서 뭐가 발끈하는지 유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내 엄마 되는 거 싫은 거예요? 그럼 왜 날 오라고 했어요?"


어느새 애 얼굴은 붉게 열이 올라있다.


"싫은 게 아니라, 자격이 없지. 엄마처럼 해 준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의 얼굴에서 붉은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아이의 호흡이 다시 편해진다.


"해준 거 '하나도' 없는 건 아닌데. 매년 보내준 책하고 일기장 잘 받았어요. 도움... 됐어요. 그런 거 준 사람 나쁜 분 아닐 거 같아서 믿고 여기 온 거예요. 난 사실 아빠는 멍청한 마마보이라 믿지 않아요."


제 아빠를 '멍청한 마마보이'라 칭하는 그녀의 말에서 저에게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 주지 않은 남편에 대한 아픈 원망이 묻어난다. 그의 어머니가 중간에 버티고 막아서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이 지낼 순 없었지만,  해마다 아이 생일에 남편 이름으로 선물을 보냈었다. 아는 게 책과 글 밖에 없는 나는 어릴 때 아빠가 사주셨던 책들을 생각하며 아이 나이에 맞을 것 같은 책을 몇 권 골라, 일기장이나 예쁜 노트와 함께 보냈다. 


"내가 보낸 건지 어떻게 알았어?"

"제가 바보예요? 아빠가 살던 집에서, 널린 게 아빠 흔적인데, 글씨체 대조도 안 해봤을까 봐요. 그리고 그런 내용은 아빠 머리에서 나올 수도 없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를 데리고 살았겠죠...."


아이의 입에서 나온 '글씨체 대조'와 '아빠 머리', '...데리고 살았겠죠...'라는 날카로운 표현들이 내 심장을 따끔따끔 찔러온다. 나는 아이에게 보내는 일기장 첫 페이지마다, 아빠가 내 일기장 첫 페이지에 써 준 글들을 베껴 써서 보내 주었다. 


"그거 우리 아빠가 나 어릴 때 써 주셨던 편지를 베껴 쓴 거야."

"왜요?"


유리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며 내 대답을 기다린다. 


"글쎄... 그 편지를 읽으면 아빠가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나는 뭐라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동문서답하는 스스로를 한심해한다. 어쨌거나 아이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개의치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아줌마 아빠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나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모으고 다 파악한 눈치다. 나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맞다는 걸 알려준다.


"앗, 죄송해요. 아줌마라고 부르려던 건 아닌데."

"너 편한 대로 불러. 난 아줌마도 괜찮아."

"난 누가 날 아줌마라고 부르면 너무 싫을 것 같아요. 아빠도 화낼 것 같아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볼 줄도 아는 아이가 신기하고 기특하다.


"아빤 내가 설득하면 되지. 너 편한 대로 정해."

"그래도, 아줌마는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좋아하는 호칭 있어요?"

"난... '작가님'이란 호칭을 세상에서 젤 좋아하긴 하는데... 것두 네 아빠가 화낼 것 같네?"


유리가 처음으로 배시시 웃는다.


"작가님이라고 불러드릴게요. 아빤 우리 둘이 설득하면 될 것 같아요."

"모녀가 사이가 좋으시네요."


유리가 웃는 걸 보며 푸근해졌던 마음에 남규식이 끼어들며 찬물을 끼얹는다. 차로 와서, 남편이 남규식에게 앞자리를 권하는 바람에 남규식은 신나서 내 옆자리에 앉으려 몸을 비스듬히 튼다. 


"아저씨 뒤에 아빠하고 타세요. 전 뒤에 앉으면 멀미를 해서요."


어디서 이렇게 당차고 똑 부러지는 애가 왔는지 모르겠다. 속이 시원해진다. 천하에 남규식이라도 막무가내 사춘기 소녀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양보한다. 


뒤에서 남규식과 남편이 서로에게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지 신경이 쓰이면서도, 남규식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에 뭔가 승리감 같은 게 든다. 정말 완전히 내 인생에서 덜어내 버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소 처리 전담 반이 된 내가 남규식을 트럭에 태워 시골 어느 구석으로 버리러 가는 상상을 한다. 남규식이 어깨에 혹이 난 인도 소로 변하는 상상을 해 본다. 필요가 없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 없어져서 버리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문 이미지 출처: https://www.skyscanner.co.in/news/mumbai-airport-terminal-2-all-you-need-to-know

이전 08화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도시에서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