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선택은? 3

단편소설 '당신의 선택은?'

by 하트온

아직 5월이지만 여름밤의 열기가 조금씩 골목길을 메우기 시작한다. 가구 가게 맞은편 정원식 스테이크 레스토랑 앞에 세워진 장난감 같은 노란 램브라기니 스포츠카가 눈길을 끈다. 차는 잘 빠진 청년 같은 이미지지만 아마도 차의 주인은 머리 결이 희끗한 중노년의 누군가일 것이다. 미국에선 오렌지족-부모의 재산으로 부유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물론 젊은 사람이 연예인으로 혹은 영화작가로 성공하거나 월 스트리트에서 탁월한 금융 기술로 돈방석에 앉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긴 캘리포니아도 뉴욕도 아니다. 돈이 웬만큼 있다 해도 누가 십억을 호가하는 저런 차를 턱 하니 살 수 있단 말인가? 멍한 눈을 하고 가게 밖을 보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온다. 어디서 봤더라.


“수지!”

“월터!”


내가 떠나온 회사에서 내 보스였던 월터다. 갑자기 내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부끄러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닌 월터를 이곳에서 마주치다니!


지난가을 그 회사를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스나 회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집에서도 회사일과 사람들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크리스마스 때 카드를 보내거나 한 번쯤 전화해서 새해 인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7년 동안이나 함께 일했는데도 회사 밖에서 만난 적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 지금 이 가구 가게를 배경으로 함께 서 있는 것이 서먹하다. 옷도 깔끔하게 늘 잘 입고 어딘지 모르게 16세기 르네상스 그림에서 본 것 같은 고전적인 귀족 분위기의 그의 얼굴은 매력이 있으면서도 거부감이 들었다. 그 거부감은 아마 그가 다른 남자동료에게 내뱉은 이 말을 듣고 난 이후 더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 나오고 돈 많이 주는 직장 찾아다니는 거 다 큰 집에 벤츠 타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자 모두 이 프로젝트에 달려있으니까 다들 내년에 이사 갈 큰 집, 멋진 벤츠를 생각하면서 힘내자고.”


그날 오후 4-5시쯤 사무실에 어둑한 그림자가 밀려드는 그 순간 그가 이 말을 내뱉었을 때 그의 부하직원 누구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는 꿈을 이미 이룬 것 같다. 그는 하버드를 나와 안정적인 회사에서 입사 15년 만에, 40도 안되어 헤드 사이언티스트 자리에 앉았고, 너른 싱글하우스에 살며 매끈하게 잘 빠진 벤츠를 운전하고 있으니까. 난 사실 내 꿈이 정확히 모른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 것인지, 향해서 나아가는 지점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내 갈 길도 잘 모르는 그런 입장임에도, 적어도 보스가 가는 길을 나도 따라가고 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학벌과 집안 배경부터 따라 할 수도 없지만.


“네가 직장 그만두고 다른 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 걸?”

“아, 인테리어 디자인 쪽으로 해보고 싶은데 공부하기 전에 먼저 실제 현장 경험을 쌓아보려고 이일 저일 하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내 보스도 아닌데 묻지도 않은 대답을 변명처럼 주절거리는 내가 한심하다.


“뭐 찾는 거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어머니 생신이어서. 어머니 바로 여기 '페더럴 힐'에 사시거든. 생신 선물 고르는 중이야.”


'페더럴 힐'은 이름 이너하버 항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동네다. 서울의 한강뷰 아파트들이 비싸듯이 미국에도 바닷가든, 강가든, 호숫가든, 물가에 있는 집들은 항상 수요가 많아 그 값이 계속 오르는 경향이 있다.


이름 있는 화가라는 그의 어머니를 말하는가 보다. 아들 둘을 다 하버드에 보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이름 있는 화가라는 타이틀까지 놓치지 않은 여자. 세상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힘든 공부를 하곤 엔지니어 직장 스트레스를 감당 못해서 7년 버티고 물러나 이곳에서 그런 어머니가 받을 선물을 골라주고 있는 내 처지가 순간 서러워진다. 귀족 주인공이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의 엑스트라인 것처럼 갑자기 신분이 훅 낮아지는 느낌이다. 내 자존감이 이렇게 형편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어머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거 있어요?”

“글쎄… 일본풍 가구나 그릇을 좋아하시는데, 여기 그런 물건들 있어?”

“저기 부엌가구 쪽에 사케 세트랑 찻잔 세트가 있어요. 한 번 둘러보실래요? 제가 함께 가서 찾는 거 도와드릴게요.”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켜주는 서비스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에서 보스와 한 공간에 있으니 7년 동안 몸에 밴 부하직원의 비굴한 습관이 여지없이 돌아와 몸에 철썩 들러붙는다. 다행히 다른 손님이 없다. 부엌가구 코너는 가게 입구에서 반대쪽으로 끝까지 걸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누군가의 진짜 부엌인 듯이 차려져 있다. 부엌 찬장 선반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그릇세트들이 옹기종기 진열되어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다.

곁에서 두리번거리며 따라오던 월터가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연다.


“나도 그 회사 그만두려고 하고 있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내 얼굴은 멍해져 있다.


“내 회사를 차리려고. 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거든. 혹시……전에 하던 일 계속해볼 생각 없어? 우리 에어포스 프로젝트 그게……정부에서 그 인젝터 대량 제조하는 회사로 키우라고 자금을 100만 불 지원하기로 결정했거든. 그 프로젝트 들고 나와서 내 회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네가 같이 일해줬으면 해서. 하겠다고 만 하면 지난번에 네가 받던 연봉에서 30%까지 올려줄 생각이 있어.”


명함과 함께 어느새 주머니에서 꺼낸 날렵한 볼펜으로 명함 뒷면에 숫자를 휘갈겨 쓴다.


“내 핸드폰 번호야. 다음 주까지 네 생각을 알려줘.”


멍하게 서있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가뿐한 걸음으로 부엌 코너를 둘러보고 한쪽에 진열된 장식장에서 사케 세트를 하나 집어 들더니 계산대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내가 재빨리 좇아갔지만 그는 이미 계산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가게 문을 빠져나가고 있다.




벌써 가구 가게에 일한 지도 아홉 달이 넘었다. 가게가 제일 한가한 월요일 저녁 8시부터 9시 사이엔 가구에 관한 교육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 일 스케줄이 없는 직원들도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이들은 꼬박꼬박 참석하여 교육을 받는다. 의무는 아니지만 가구를 팔면서 손님의 질문들을 받다 보면 대답할 수 없었던 궁금한 사항들이 생기고 더 잘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는 생각에 나도 지난달부터 교육시간에 빠지지 않고 있다. 가구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사장이 직접 강의를 한다.


오늘 교육의 제목은 “저가 가구와 고가 가구의 차이점”이다. 사장이 두 개의 식탁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저가 가구들과 고급 가구점에서 파는 가구들은 나무의 재질도 그러하지만 조립방식 자체에 들여진 공이 다르다고 하며 그가 두 개의 식탁을 뒤집어서 보여주었다. 한 식탁은 볼트와 너트로 다리가 이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힌지 처리가 되어 있었다. 사장이 힌지 처리가 된 식탁을 가리키며 이 것이 더 고급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사장은 우리 가게 가구의 주 공급원인 인도네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가구회사들의 리스트가 있는 종이를 나눠주며 각 회사의 평판과 가구의 특징을 짚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원목으로 만든 가구와 합판으로 만든 가구 제품들의 장단점과 보수 유지 요령도 일러주었다. 사장의 조언들을 종이 앞 뒤로 빼곡히 적어가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보물인양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 가구점을 차리기 위해 수년간 동남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를 발로 뛰며 공부한 사장의 지식엔 아직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정보가 필요한 손님들 앞에서 풍월은 조금 읊을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배운다는 것은 재미있다. 그리고 이런 공부는 엔지니어링 보다 쉽고 내 생활의 범주 내에선 더 실용적인 것 같다.


교육시간이 끝나고 모였던 자리를 함께 정리하면서 사장이 물었다.


“전직이 엔지니어라고 했었죠? 가구에 대해 배우는 것 재미있어요?”

“네. 손님 맞으면서 모르는 게 많아 늘 매니저를 불러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평소 궁금한 것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사장님께서 교육시간을 주시니 참 좋은 것 같아요. 많이 도움돼요.”


사장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다.


“사장님,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잠깐 수지 양. 내가 뭐하나 물어볼까요?”

“……”

“지난번에 디자이너가 오지 않아서 수지 양이 매니저를 도와 부엌 방을 꾸몄다고 들었어요. 매니저에게 물어봤더니 수지 양이 배치한 것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아….. 네…… 매니저님이 손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 조금 도와 드린다고 한 것이 저도 모르게 장식하는데 너무 신이 나서 여쭤보지도 않고 가구 배치를 이리저리 바꾸고 장식물을 여기저기서 옮겨와 꾸며서 안 그래도 매니저님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한 말씀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꼭 여쭤보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에요. 내 말은 그게 뭔가 독특했어요. 수지 양의 손 끝이 스친 공간마다 따뜻한 집처럼 아늑하면서도 화려한 생명력이 살아나는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아……”

“내가 제안 하나 할까요? 다음 달부터 디자이너 대신 수지 양이 각 절기 컨셉을 정해서 한 번 가구 가게 전체 장식을 맡아서 해보겠어요? 보수는 더 올려줄 수 없지만 수업 하나 수강료를 내어줄게요. 이 근처에 MICA라는 미대에 가을 학기마다 <인테리어 디자인의 개요> 수업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 시간이 되겠어요? 그 수업을 들으면서 수지 양이 그 분야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되는지 한 번 봅시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이야기 다시 하고요. 만약 수지 양이 그 분야에 뛰어들 마음이 있으면 졸업 후 우리 가게 전문 디자이너 겸 인테리어 디자인 컨설턴트로 적어도 5년은 일하겠다는 계약을 조건으로 인테리어 디자인 과정을 밟는데 필요한 학비를 지원하겠어요.”


'어머나, 어머나! 내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지금 이 가게의 매니저 제니도 이렇게 사장이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 가구도 데이나만큼 잘 팔지도 못하고 아직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초보인데 사장님이 이런 제안을 해주시다니, 뭔가 지금까지 바닥을 기며 고뇌했던 시간에 대해 보상이 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우쭐거리는 마음에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마가 끊여놓으신 김치 감자탕을 먹으며 사장님의 제안과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 모르는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막상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니 차가워진 밤공기처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일이면 지난번 가게에서 월터를 만난 지 이주일 째지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아직 그에게 전화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앞에서 가구점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조리 떠들어 대면서도 월터를 만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양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시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지금의 작은 선택이 가져올 미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겠지. 한 길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 보일락 말락 좁은 길. 인테리어 디자인을 좋아하게 될까? 지루해지지 않고 끝까지 공부해 낼 수 있을 만큼 적성에 맞고 잘할 수 있는 일일까? 오, 육 년 뒤나 되어야 풀타임을 해서 월급을 제대로 받고 생활할 수 있을 텐데. 그땐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 다른 한 길은 지금까지 공부하고 일하며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해서 익숙한 대로변처럼 넓은 길. 이미 경력도 있고 당장 안정적인 월급도 보장되어 있다.


모래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다. 저 모래사막을 지나면 기름지고 살기 좋은 가나안 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언제 다다르게 될지 모르는 기약할 수 없는 그 땅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대는 떠나온 곳으로부터의 다시 돌아오라는 유혹. 이 밤에 나는 친구 진현이가 그리워진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의 다부지고 낭랑한 음성,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녀의 충심 어린 조언이 그립다. 하지만 오늘 밤은 너무 늦었다. 사실 난 그녀가 뭐라고 할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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