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삼일 간의 파티'
사람의 뒷모습에서 꾸미지 않은 진실이 묻어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마음에 슬픔이 있을 때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돌아선 등의 선이 힘없이 쳐져있는 건 누구도 가릴 수 없다.
남편의 등은 오늘도 어김없이 단단한 자신감이 넘친다. 숙정은 남편의 적당히 근육이 붙은 반듯하고 넓은 등을 가만히 응시한다. 완벽한 등.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명령하고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이 완벽한 등에서 나오기라도 하듯 빈틈없는 이 등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높고 넓은 벽에 둘러싸인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온다.
급기야는 그를 등지고 돌아누워 버린다. 남들은 숙정이 돈 잘 버는 모범남편과 함께 사랑받으며 걱정 없이 사는 줄 안다. 남편을 아이 다루듯 어르며 싹싹한 마누라 연기에 능숙하다. 보는 사람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부족한 행복감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채운다. 지금과 다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 그러나 상상 속의 주인공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다.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가진 20대 중후반의 처녀다. 그녀는 그렇게 나이 먹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 속 주인공에 비해서 늙었다고 생각한다. 실제의 스스로가 처한 상황이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풋”
상상을 하다 현실로 깨어나면, 그녀는 그렇게 헛웃음을 웃는다. 그녀는 자신이 사과 궤짝 안에 갇힌 토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보드라운 토끼털을 입고, 예쁘장한 얼굴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눈은 충혈되고, 늘 놀란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살피는 그녀.
사과 궤짝에 갇히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그녀가 필요한 만큼만 뜯어다 놓은 양상추며, 셀러리 같은 야채를 두 손에 꼭 쥐고 먹는 일상에 기억에도 없는 순간부터 길들여져 있다. 누구랑 어디에 살든 삶이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상상력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막다른 골목을 둘러싼 높다란 벽이다.
‘드르렁 쿨…… 드르렁 쿨……’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든 남편의 뒤통수를 찌를 듯 노려보다가 방문을 부러 조심성 없이 닫아 붙이고 부엌으로 갔다.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 랩탑을 열고 인터넷을 연결한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가볍게 덮은 채 중지로 마우스의 가운데 돌림 단추를 살짝 몸 쪽으로 굴렸다 검지로 마우스의 왼쪽 단추를 눌렀다 하며 워싱턴 지역 <직업> 페이지에 가득 뜬 일거리 광고들을 손에 닿는 대로 펼쳐본다.
아기 키우고 집에서 가족들의 뒷바라지만 해온 그녀의 경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찾기 쉽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매일 밤 지역 구인란을 살펴보고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뉴스들을 읽고 나야 그나마 살아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청할 수 있다.
오늘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독감에 걸렸다고 오지 않아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고 집안일은 나몰라라 하는 주제에 입만 열면 숙정을 대놓고 무시하는 남편의 야속한 말들에 저녁 내내 속을 끓였더니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삼십 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지만 벌써 노인이 된 듯 힘이 없고 찌부드드한 느낌이 가시지 않고 몸속에 켜켜이 베어드는 것만 같다.
이젠 자야겠다 싶어 랩탑을 덮으려는 찰나 미처 예상치 못한 제목 하나가 눈에 띈다. <단역배우 구함>! 빠른 손놀림으로 제목 위를 클릭하여 자세한 설명이 담긴 페이지를 펼친다.
[...... 워싱턴 지역에서 단역배우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니콜 키드먼이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로 배우 지망생들에게 좋은 경험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인종, 모든 연령대의 단역배우를 모집하고 있사오니......]
그것은 바로 <단역배우>를 찾는 광고였다! 오디션장은 워싱턴 디씨 북서쪽에 위치한 중급 호텔이었다.
어디서 용기가 나는지 모른다. 인생 처음으로 <오디션>이라는 것을 한번 볼 참이다. 혹시 아는가? 감독의 눈에 띄어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라앉는 기적이 생길지. 이 직업의 특성상 정말 그런 일이 있잖은가?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어요.”, “그냥 친구 따라 갔다가 감독님의 눈에 띄어……”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은가? 그때는 이 남편 놈의 등짝을 제대로 한대 갈겨주고 떨쳐 버리리라. 배우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을까 하는 일말의 이성적 생각조차 없이 그녀의 머릿속은 오디션에 입고 갈 옷 걱정으로 가득 찬다.
오디션 날 아침! 풀 먹인 듯 빳빳한 가을 하늘이 아침부터 드높게 걸려있다. 그녀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 차림에 머리는 살짝 틀어 올려 큐빅이 알알이 박혀 번쩍거리는 커다란 집게핀으로 고정하고 은백색과 은회색 아이샤도우로 눈을 강조한 여신 컨셉의 풀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잔뜩 차려입고 나가는 그녀를 어리둥절 쳐다보는 도우미 아줌마에게 다리를 붙들고 놓지 않는 아이를 떠넘기다시피 하고 단호하게 나올 때는 가족 떼놓고 전장에라도 나가는 여장부 같은 태세였는데 호텔 입구에 들어서니 가슴이 떨리고 손에 땀이 솟기 시작한다. 어릴 적 운동회 때 전교생 앞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려 출발선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기분이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차림의 젊은 여자들부터 아이들, 할머니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호텔 리셉션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줄을 서서 사진 촬영을 받고 있는 사람들, 면접관 앞에서 인터뷰를 받고 있는 사람들, 테이블 앞에 앉아 서류작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인터넷에 올라온 <단역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이 평일 오전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디션을 보러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순서를 따라 입구에서 서류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름과 주소, 연락처 따위의 기초사항들을 적고, 언제 시간이 되는지 자세히 기입하도록 된 스케줄 란에는 <언제든지 가능함>이라고 적는다. 언제든지 어떻게든 꼭 이 영화의 일부분이 되고 싶다.
다음은 특기란. 이 영화에서 어떤 배역을 맡으려면 이 부분을 잘 작성해야 한다는 예감이 온다.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니콜 키드먼이 과학자로 나오는 공포 액션 영화라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그렇다면 니콜 키드먼의 동료 과학자로 그녀의 실험실 씬에 나오는 배경인물이 되면 어떨까? <과학실험>이라고 적어 넣는다. 이래 봬도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던 그녀다. 문득 하얀 실험복을 입고 조를 짜서 실험하고 보고서를 쓰곤 했던 기초화학실험 시간이 떠오른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태권도>라고도 적어 넣는다. 둘러보니 여기 지원자들 중에 동양인으로는 혼자인 것 같은데 액션씬에 아시아계 여성 한 명쯤 넣으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은가. <찰리스 엔젤스>의 <루시 류>처럼 말이다. 태권도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국사람으로서 서당 개 삼 년 날렵한 발차기 모션 정도는 흉내 낼 수 있다. 있겠지. 오늘 당장 태권도장에 등록해야겠다. 어차피 영화도 실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션의 연속일 뿐일 테니까 얼마나 태권도를 잘하는지 보려고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류작성을 마치고 인터뷰를 기다리는 대기석에 앉아 적당히 근육이 붙은 자신의 긴팔을 내려다본다. 원래 그녀는 팔이 초등학교 학생의 것처럼 아주 가늘었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에는. 밤에 서너 번씩 깨던 아기를 키웠던 덕분에 저절로 팔에 근육이 생겨났고 힘도 세어졌다. 검은 타이즈를 신고 팔과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탱크톱을 입고 머리는 길게 올려 묶은 채 니콜 키드먼과 등을 마주 대고 서서 적의 공격에 방어하는 태세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을 빌어 생각하며 혼자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이름 소리가 들려온다.
“숙!”
오! 면접관이 그녀를 부르고 있다. 아찔하도록 가늘고 섬세한 줄 장식의 스틸레토에 발이 묶인 그녀는 아기 걸음마하듯이 한 발 한 발 붉은 카펫 위를 정성껏 걸어 면접관 앞으로 가서 섰다. 면접관은 차분한 태도로 거주지와 직업과 스케줄에 대한 가벼운 질문들을 던지고는 가져온 포트폴리오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고 없다고 하자 사진 촬영사를 불러 그녀의 전신사진과 얼굴 사진을 찍도록 지시한다.
사진사는 수차례 셔터를 눌러대며 여러 각도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다.
“전화로 연락드릴 거예요.”
사진 촬영사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한다. 오늘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인지 그녀가 맡을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뜻인지 확실치 않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 이 일은 길에서 우연히 주운 로또처럼 잃어도 잃을 게 없는 도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