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삼일 간의 파티'
“찬이 엄마, 이번 주 토요일에 ‘영화 촬영’이 있다고 했지요?”
"네. 이번에도 확실히 와주실 수 있는 거 맞죠?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괜찮으신 거 맞죠?"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영화 촬영'이기에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많은 사람들의 스케줄을 고려해 주말이 가장 적당한 걸로 결정이 난 모양인지, 지금까지 두 번의 영화 촬영과 이번 토요일 세 번째 촬영까지 모두 토요일로 잡혔다.
오디션을 본지 한 달여 뒤에 불쑥 전화가 왔었다.
“당신은 파티에 초대된 인터내셔널 게스트 중 한 명인 ‘동양에서 온 귀부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촬영차 오실 때에는 오디션에 입고 왔던 그 드레스를 입고 오십시오. 그리고 저희 영화사 소속 스타일리스트가 그 드레스에 맞추어 나머지는 코디해드릴 것입니다. 스타일링 스케줄이랑 촬영 스케줄은 이메일로 계속 보내드리겠으니 시간에 맞추어 나와 주십시오......”
캐스팅 디렉터인 리사 테일러라고 소개를 한 여자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지난 한 달 동안 두 번의 촬영을 했다. 이번 주 토요일이 마지막 촬영이다.
"일없슴다.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영화 촬영', 대다이 중요한 일인데 해드려야지요."
도우미 아줌마가 진한 연변 사투리 억양을 담아 ‘영화 촬영’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할 때마다 주연 여배우라도 된듯한 아찔한 망상의 바다에 젖어드는 자신을 향해 깔깔 웃음이 맥주 거품처럼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넘쳐 오른다. 원래 토요일에 오지 않는 아줌마지만 특별히 ‘영화 촬영’이 있는 동안 급료를 조금 더 얹어 부탁을 했다. 중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매달 급료 대부분을 부치고 룸메이트와 원베드 아파트에서 연명하듯 살아가고 있는 아줌마의 형편이라 결코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또 나가? 하루 종일?”
내일 마지막 촬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남편이 펄쩍 뛴다. 안 그래도 숙정이 하는 일들이 못마땅한 남편이 이럴 만도 한 것이 지난 두 번의 촬영이 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자정이 가까워 끝나는 바람에 혼자서 아이 똥기저귀 갈고, 다시 목욕시키고 재우느라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이게 다 투자야. 아무나 오디션에 뽑히나? 감독 눈에 띄어 할리우드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될지 누가 알아?”
불편하게 차려입고 종일 기다렸다 찔끔 촬영하고 또 기다리고 하는 생고생을 두 번 겪고 나니 숙정도 그리 썩 내키는 걸음도 아니건만 매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하고 지내다 겨우 3일 나가는 건데 춤바람 난 마누라라도 목격한 모양 남편이 면상을 있는 대로 구기니 그녀는 오히려 오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애 딸린 아줌마가 무슨 영화배우? 헛짓하고 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어라. 엑스트라니 뭐니 그게 할 짓이냐? 왜 생고생을 사서해? 애 엄마가 하루 종일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오는 거 네가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냐? 내일 네가 맨날 노래 부르는 프렌치 레스토랑에 데려가 줄 테니 그 영화 촬영이니 뭐니 하는 헛꿈은 접어라, 알겠냐?”
“당신은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니면서 난 왜 안되는데?”
“내가 놀러 다니냐? 네가 돈 벌어 올래? 집값 걱정 세금 낼 걱정 없이 삼시 세 끼 먹으며 도우미 아줌마 써가며 편안히 살게 해 주니까 호강에 받쳐서 머리가 홱 도냐?”
“그래! 내가 돈 벌어올게. 네가 집에 있어 봐. 애 수발들면서 너 같은 철부지 독불장군 남편 아침저녁 챙겨 먹이면서 하루 종일 집에 있어보란 말이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뭐, 철부지?”
갑자기 남편의 안색이 굳어지자 순간 심장이 오그라 붙는 듯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숙정이 멈칫한다. 남편의 이마 언저리가 불콰해지더니 퍼런 핏줄이 몇 가닥 튀어 오른다. 차마 그의 눈을 보지 못하고 글썽해진 눈망울을 아래로 향하자 물기 너머로 남편의 꼭 쥔 주먹이 어른거린다. 그녀의 눈에서 어쩔 수 없는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진다.
“마지막이니까. 일단 약속은 한 거니까 다녀올게.”
목이 잠긴 듯 톤을 낮춘 채 사정하는 듯한 숙정의 목소리에 남편은 더 이상 대꾸 없이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촬영을 앞두고 괜히 긴장해서였는지 남편과 말다툼으로 심난해서였는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숙정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본 것이 2시 20분쯤. 아마 새벽 3시쯤 되어서 잠들었을까?
까무룩 검은 잠에 젖었다가 깨어나니 8시 20분이 조금 지난 시각! 두통이 함께 잇따른다. 시간 약속에 철저한 아줌마는 벌써 와서 아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다.
9시 50분까지 집결지인 알. 에프. 케이. 스테디엄으로 가야 촬영장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숙정은 물에 젖은 솜 가마니처럼 늘어진 몸을 일으켜 초고속 샤워를 하고 머리카락이 아직 젖은 채로 튜브 드레스에 몸을 끼워 넣었다. 은색 광택이 도는 실크 안감 위로 프랑스 자수 같은 문양이 우아하게 짜인 검은 망사 천이 흐르듯 덮고 허리엔 검은 실크천으로 리본을 묶어 허리선을 드러내는 형태의 드레스다. 오디션 전날 집 근처 블랙&화이트 매장에서 한눈에 띄어 구입한 것이었다. 이 드레스와 스틸레토 힐 구두 한 켤레를 같이 마련하고 300불 이상 구매 고객에게만 주어지는 멤버십 카드와 함께 생애 처음으로 파티용 드레스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은 숙정에게 생각보다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거의 위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오늘 아침은 숙정이 밑 화장을 할 시간이 없다. 빠른 속도로 드레스 위에 회색 긴 코트를 걸치고 편한 실내화 한 켤레, 책 한 권을 쇼핑가방에 담아 넣고 집을 나섰다.
알. 에프. 케이. 스테디움 7번 랏은 희한하게도 스테디움 반대편 동네 쪽으로 난 길을 돌아 들어가 있다. 스르륵 차바퀴가 천천히 주말 아침의 고요한 콘크리트 바닥을 미끄러져 파킹랏 깊숙이 들어가면 한가운데 엑스트라 배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헤이 숙, 좋은 아침이야”
턱시도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왈리볼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차 안에서 나오는 숙정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춘다. 어쩜 이렇게 곱게 늙었을까? 하얀 은발에 60은 훨씬 넘어 보이지만 부티가 나는 얼굴빛. 사람은 늙으면 얼굴에 삶이 묻어난다고 하지만 단역배우들은 말끔한 얼굴 뒤에 어떤 삶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번 처음 왈리 볼과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을 촬영 첫날 저녁식사 장소에서 만났을 때, 숙정은 그들을 보며 어느 정도 입지를 가지고 있는 중견배우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무리가 아닐 만큼 그들의 외모는 어느 영화에서 분명히 본 듯 익숙하고도 아름다웠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몸짓과 목소리도 더없이 우아하고 특별해 보였다. 첫날 촬영이 끝날 무렵 저녁을 함께 먹으며 그들이 단역 전문 배우들임을 알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 어느 곳이라도 찾아갈 정도로 자신의 일에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동양인. 서양인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얼굴들만 모아놓은 듯한 이 틈에서 분장 전 더욱 절실하게 드러나는 납작 동그스름한 얼굴, 낮은 코, 수수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생각하면서 그녀가 잠시 의기소침해져 있는 사이 단역배우들을 태운 버스는 분장과 준비 및 아침식사를 할 수 있도록 유랑극단 같은 텐트 시설이 차려진 조지타운 포토맥 강가에 위치한 큰 파킹랏으로 유유히 흘러 들어간다.
오늘따라 날씨가 싸늘하다. 소품 보관대에서 이름이 적힌 투명 비닐봉지를 받아 든다. 스타일리스트가 지정해 준 모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팔찌, 검은 이브닝 백과 구두가 지난주에 반납한 그대로의 순서로 들어있다. 소품대를 지나 주위를 돌아보니, 헤어와 메이크업 분장사들이 일하는 분장실이 차려진 트레일러 차량 앞에 단역배우들이 줄을 서있다. 지난주 분장을 받은 분장사를 찾아 똑같은 분장을 받아야 하므로 줄 선 모양새가 더 복잡하다.
숙정은 마주 보고 서 있는 트럭의 발 딛는 선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져온 소설책을 펼친다.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제목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이다.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라서 그런지 몇 년 전 한국어 도서코너가 생겼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한국어 활자를 피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늘지도 않는 영어를 걱정하기엔 인생 자체의 문제가 너무 많아서 익숙한 활자가 주는 정신적 안정감이라도 취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숙, 네 차례야, 서둘러”
숙정의 메이크업 담당인 소피가 손가락을 메리 쫑 하듯이 그녀를 향해 두어 번 까딱거리곤 쌀쌀한 바깥공기를 등지고 난방이 돌아 따뜻한 트레일러 안으로 쏙 들어간다. 책을 덮고 천천히 트레일러 분장실 입구의 철계단을 오른다. 잠도 잘 못 잔 데다 찬바람을 맞으며 있었더니 몸에 무거운 추라도 매달린 듯 나른한 몸살기가 몸을 아래로 누른다.
“밑 화장을 안 하고 오면 어쩌란 말이야!”
부은 얼굴의 소피가 형광색 아스피린액을 한 모금 마시며 인상을 찡그린다.
“밑 화장을 안 해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단 말이야”
마음이 풀리지 않는지 소피가 큰 눈을 굴려대기만 하고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미안, 늦잠 잤어. 몸살인지 아침에 일어나기 너무 힘들더라고.”
정말 미안하다기보다 그녀의 짜증을 피하고 싶다. 그녀도 얼굴 기색이 영 말이 아니게 피곤해 보인다. 몸이 지친 사람들은 마음도 부드러울 수 없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 외에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솔직히 말해 아쉬울 것도 없다. 오늘의 일을 위해 숙정의 얼굴은 분장이 되어야 할 뿐 그녀의 목적도 임무도 아니다. 분장은 오롯이 그들의 일이다. 조바심을 낼 이유가 없다. 그저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숙정이 입술을 굳게 다물어 버려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눈 감아봐.”
그녀는 조금은 상냥해져서 숙정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시간이 없어 수분크림도 바르지 못해 까칠한 얼굴이 그녀의 손이 문지르는 대로 탄력 없이 밀린다. 눈두덩이에 아이샤도우를 바르고 다음엔 볼터치, 그리고 입술에 립스틱......
“눈 떠도 돼 이제.”
눈을 뜨자 화장한 얼굴이 또렷이 드러난다. 지난번과 다르다! 얼굴이 피곤해서 더 부어있는 탓도 있겠지만 아이샤도우의 색이 확연히 다르다. 지난주엔 와인색에 가까운 보라색 계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더 갈색 빛이 돈다. 지난번 파티에 가는 우아한 부인의 상기된 얼굴과 달리 오늘 부인은 우울하고 그늘져 보인다.
숙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 담당에게로 갔다. 유일한 남자 헤어드레서인 프랭크가 그녀의 담당이다. 두부살이 덕지덕지한 카우치-포테이토형 몸매로 전구 달린 화장대와 싱크대와 서랍들로 둘러싸여 좁디좁은 트레일러 복도를 힘겹게 왔다 갔다 하며 내 머리카락에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곤 열기구로 머리카락을 쫙쫙 편 후 머리끝부터 동그랗게 말아 올려 실핀으로 고정시킨다. 하루 종일 머리형이 유지되어야 하므로 스프레이 범벅이 굳어 잔머리 한 터럭도 흩날리지 않는다.
이상하게 머리 모양도 화장도 어딘가 다르다. 숙정은 마음에 들지 않아 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곧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불쾌한 기분을 밀어낸다. 이건 어차피 <내>가 아니니까. 파티씬에 소속된 한 동양 부인의 얼굴일 뿐. 헤어 디자이너와 메이컵 아티스트가 이해한 극 중 인물의 성격이 그렇게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분장을 다 마친 단역배우들을 실은 버스는 디씨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체코대사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매사추세츠 에브뉴와 34가가 만나는 로터리 한쪽 가에 선다.
주변 관리가 사뭇 삼엄하다. 영화 촬영지 주변으로 찻길도 막고, 주말 아침 산책 및 조깅하는 사람들도 촬영지를 통과해서 갈 수 없도록 되돌려 보내고 있다. 어제 다 하지 못한 촬영분을 하고 있다고 단역배우 매니저 매튜가 버스 위로 올라와서 설명한다. 소방차 두 대가 공중에서 물을 뿌려대고 있다. 비 오는 장면을 찍고 있나 보다. 기다려야 한다. 숙정은 내려서 간식 가판대에서 뭘 좀 먹을까 하다가 하얗게 김이 서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스텝들의 잔뜩 움츠린 모습들이 너무 추워 보여 마음을 바꾸고 아까 읽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탤런트가 되어버렸다. 탤런트의 배역과 역할을 좌우하는 것은 탤런트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광고주와 시청자들의 반응과 방송국 소유주이듯, 우리는 끝없이 광고로부터 욕구를 전달받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조절당하고, 우리의 물질적 소유주인 직장 상사나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는 세대다. 내 안에,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과 직장생활은 정해진 대본처럼 상투화되어가고 있다 –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중에서]
물질적 소유주로부터 간섭받는 세대. 언제는 아니었을까? 태어나면서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부와 힘을 거머쥐고 태어나지 않는 한 물질적 소유주 – 부모, 남편, 때론 아내나 자식, 직장상사 – 로부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길은 없어 보인다. 1년에 한 번씩 큰 배의 선장인 아빠가 나타나서 금화 상자들을 던져주고 또다시 떠나는, 어른보다 힘센 <삐삐>가 아닌 다음에야 어려운 일이 아닐까? 문득 <삐삐>가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삶을 허락하게 하는 기반이 있었구나 하고 숙정은 무릎이 탁 쳐진다.
단역배우를 관리하는 매니저, 매튜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 번씩 단역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들어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오늘은 언제쯤 촬영이 끝나는지 설명을 해주곤 한다. 그의 말대로 정확하게 모든 것이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듣는 쪽에서 적당히 가감만 할 수 있다면 그의 말에는 나름대로 성실한 정보가 담겨있다. 가령 한 시간 후에 촬영이 시작된다고 하면 두세 시간 안에는 카메라 앞에 서게 되겠구나 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잠시 눈길이 숙정의 얼굴에 머무는가 싶더니 입술이 웃음을 참는 듯 일그러진다. 두꺼운 화장 껍질 뒤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번 영화 촬영이 시작된 뒤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의 시선에 조절당하고 있다. 그의 시선을 받으면 소녀가 된 듯 들뜬다. 그는 그녀가 30이 넘은 결혼한 여자라는 것도, 분장 밑에 가리어진 거뭇한 기미조차도 모른다. 그래도 그를 보는 일과 그의 시선을 느끼는 일은 무료한 기다림을 견디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스스로가 아이가 딸린 엄마라든가 남편이 있는 여자라든가 하는 도덕성과 죄책감 따위는 두꺼운 화장 껍질 뒤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여기 모인 모든 구성원들, 영화감독이든, 주연배우든, 감독 휘하 여러 매니저들, 그들과 협력하고 있는 단체들, 사람들, 소품들, 작업 공간들, … 이 모든 것은 이 영화를 위해 잠시 모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원래 직업이 버지니아에 있는 건축사무소에서 그래픽 디자인일을 한다는 매튜는 영화일이 들어오면 회사에 휴가원을 내고 몇 달간 영화촬영소에서 무슨 일이든 한다고 했다. 이 영화가 끝나면 그도, 숙정도, 여기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공기 중의 수증기처럼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상대 배역과 사랑에 빠졌다가 또 다른 영화를 찍게 되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곤 하는 유명 배우들의 연애 편력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다시는 배우들의 연애 행각을 놓고 험담하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결심한다.
“여긴 차가 주차할 수 없는 곳이라 시당국으로부터 버스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곧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서 단역팀은 이곳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모두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잠시면 됩니다. 자, 자, 다들 내려주세요. “
오, 노!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라니. 책이나 음악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좁은 버스 통로를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와 매튜가 비켜서 있는 앞문을 통해 내린다. 낙엽조차 다 떨어지고 메마른 11월의 나뭇가지와 디씨의 고층빌딩들 사이로 늦가을 찬바람이 휘잉 휘잉 불어대고 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녀의 모습이 1초라도 나오게 될지, 며칠에 걸쳐 찍은 씬 자체가 싹둑 편집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영화 작업의 한 편에 존재했다는 사실, 아니 동양 여인 1이 잠시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1초간 등장하는 단역배우의 삶에 관객들이 관심 없듯이 그녀도 관객들의 시선 따위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긴다. 이 추위를 견디며 긴긴 기다림을 한 대가를 영화에 몇 초나 등장하는가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자, 파티씬 차례입니다. 파티장에 입장하는 씬은 지난주로써 끝났고 이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파티신을 찍는 동안 모든 담소 및 먹고 마시는 연기는 팬터마임으로 해야 합니다. 웨이터 역할을 맡은 분들도 가능하면 소리를 내지 않고 와인잔들을 운반하도록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매튜가 기다림의 끝을 알리며 파티씬 촬영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추위를 견뎌보려고 겨울 볕이 희미하게 든 건물 사이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단역배우들의 얼굴에 돌연 생기가 돈다.
검은 턱시도를 매끈하게 차려입은 키 작은 키아누 리브스, 닉이 숙정의 옆에서 팔짱을 끼라는 시늉을 한다. 닉의 키는 그녀가 슬리퍼를 신었을 때의 키와 같다. 이 영화 바로 전에 브래드 핏과 멧 데이먼과 함께 FBI 영화를 찍었다고 눈을 반짝거리며 쉬는 시간 내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던 닉은 얼굴이 굳은 채 말없이 심호흡을 하며 동양에서 온 귀부인을 에스코트할 준비를 하는 듯하다. 진짜 동양의 귀부인이라면 어떤 걸음걸이를 하고 어떤 몸짓을 하며 어떤 눈빛으로 파트너를 바라볼까?
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하고 우아한 드레스에 머리와 화장을 완벽히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숙정은 스스로가 귀부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머릿속에 입력된 귀부인에 관한 정보를 아무리 짜내려 해 봐도 <동양에서 온 귀부인>의 역할 모델이 될 만큼 구체화되어 떠오르는 것이 없다. 사극에서 본 중전마마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녀들이 전하의 팔짱을 끼고 파티장에 입장하는 씬은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어이없게도 <왈츠>가 생각났다. 어떤 영화에서 보았던 <왈츠>를 추던 서양 귀족들의 모습도 동시에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양 귀부인을 떠올리자 뇌에서 몸으로 그리고 팔과 다리로 행동지침들이 신경을 통해 전달되기 시작했다. 숙정은 허리를 쭉 펴고 턱을 쳐든다. 이 정체성 불명의 귀부인은 손목에 힘을 빼고 가볍게 닉의 팔에 손을 얹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파티장 신을 찍기 위해 대여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의 내부로 사뿐히 머릿속에 도는 왈츠곡에 맞추어 입장했다.
평범해 보이는 회색 벽돌 외벽과는 대조적으로 건물 내부는 굉장히 아름답다. 체코의 국화 티리아를 그린 모양인 듯 아름다운 천장 벽화가 한눈에 펼쳐져 있고, 그 천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들을 감싸고 흐르는 하얀 몰딩도 정교한 레이스 장식처럼 화려하게 세공되어 있다. 고급스러운 벽지와 가구들은 세계 각국의 대사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 장소답게 고급 사교장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하고 있다.
파티 홀은 크게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문을 등지고 오른쪽 방에는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영화장비들과 모니터, 그리고 그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감독하는 영화 연출 스태프들이 진을 치고 있고, 가운데 방과 왼쪽 방에는 단역배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하는 연기를 준비하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역을 맡은 검은 유니폼 차림의 배우들은 샴페인과 핑거푸드를 손바닥에 올려 빠릿빠릿하면서도 우아한 태도로 사람들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연기 연습에 몰두해 있다. 주연배우들은 가운데 방 천장에서 검은 마이크가 내려온 지점에 둘러서서 대본을 살펴보고 있다. 붉은 드레스에 단발머리를 한 니콜 키드먼이 영화감독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잡지나 영화관 화면을 통해서 보던 것보다 훨씬 생기 있고 젊어 보인다. 풍만한 볼륨감과 쓰러질 듯 가느다란 팔다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바비인형처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숙정과 닉은 니콜 키드먼의 바로 등 뒤에 다른 단역배우 한 커플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니콜 키드먼에게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질 때마다 드레스 입은 동양 귀부인의 모습이 배경에 비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숙정은 나름 긴장이 된다. 촬영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주연배우들은 큰 소리로 각자의 대사를 읊조리며 연기하기 시작하고 배경을 이루고 있는 단역배우들의 팬터마임 연기에도 열기가 오른다. 중요한 대화 중인 듯 찡그리기도 하고 크게 박장대소하는 듯 모션을 취하기도 하면서 입모양을 여러 방향으로 오므렸다 폈다 하고 양손을 펼쳤다 모았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대화하는 연기들을 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사인에 맞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조용히 열정적으로 팬터마임 연기를 하고 있다! 이 사람들과 장단 맞추어 웃고 마시며 대화하는 연기를 난생처음 해보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민망함과 난감함과 비현실감이 동시에 교차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감독이 멈추라고 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연기하고 있는지 거울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몇 분간 휴식을 갖는다. 다들 소리를 내어 기침도 하고 말소리도 낸다.
“너, 뭐 하는 거야!”
누군가가 무시무시하게 성난 목소리로 외친다. 일제히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다. 감독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감독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다. 감독 앞에 어정쩡 히 서 있는 웨이터 복장의 키 큰 젊은 남자의 뒷목도 민망스럽게 붉다.
“저 녀석이 또 오버 연기를 했구먼……쯧쯧……튀어보겠다고 말이지……”
메이드 복장의 아줌마가 뭘 아는 모양이다.
“맨날 혼나면서도 한 번씩 저러네. 하긴 저렇게라도 안 하면 어떻게 감독이랑 눈 한 번이라도 마주쳐 보겠어. 단역배우만 전전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겠지.”
감독은 방 안으로 사라지고 젊은 남자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쪽 구석으로 가 벽에 기대선다. 멍하게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숙정의 팔꿈치를 누가 슬며시 잡는다. 닉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다.
“나 영화 찍는 거 처음이라서 말이야.”
그녀는 혼자 머쓱해져서는 미안한 듯 변명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누구나 처음이라는 걸 거쳐야 하는 거니까.”
닉이 어깨를 으쓱하며 걱정 말라는 손짓을 던진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을 잇는다.
“저기, 괜찮다면 우리 자리를 좀 바꿀 수 없을까? 나는 왼쪽 옆모습이 더 자신 있어서 말이야.”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신의 필요를 당당히 말하고 있다.
“그래?”
순간 ‘나의 필요는 무엇인가’ 그녀는 생각해보았지만 필요를 생각하고 먼저 말하는 기회는 물 건너갔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
“그러지 뭐. 난 상관없어.”
숙정이 닉과 자리를 바꾸고 보니 여기선 카메라의 각도에서 살짝 비켜난 데다 카메라와의 사이에 키 크고 몸집 좋은 남자 배우가 하나 끼어들어 있다. 닉은 이제나 저제나 카메라에 비칠 기회를 정말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와서 자선사업가처럼 양보해 버리고 있는 스스로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나 자신의 필요들을 미리 염려하고 보호할 줄 모르는 채. 그래서 나의 삶은 항상 주인공의 자리에서 밀려나 누군가를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었던 것인가?’
반납해야 하는 이브닝 백과 구두와 액세서리들을 벗어버리고 나니 숙정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했던 물건들의 무게가 덜어져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하다. 가져온 슬리퍼를 신고, 코트를 걸치고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대사관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는 교회건물 앞으로 걸어가면서 모든 것이 누더기로 다시 변한 익숙한 현실로 되돌아온 신데렐라가 된 듯 찬바람이 살을 에는 춥고 고통스러운 현실감에 진저리를 친다. 버스 앞에서 시간 카드-배우들이 일한 시간을 기록한 표-를 거두고 있는 매튜를 보고도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고 따스한 기운을 찾아 버스에 쏙 올라탔다. 애 딸린 아줌마가 맞긴 맞나 보다. 몸이 힘드니까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돌아오는 내내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집으로 왔다. 따뜻한 목욕. 튜브 드레스를 파고든 찬바람에 얼어버린 손과 발을 따뜻한 물에 푹 담그는 것이 지금의 자그마한 소망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 무릎에 기대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이를 눈으로 확인한 후, “저녁 차릴까요?”하는 아줌마의 질문에,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퇴근하셔요”하고 부엌을 향해 외치듯 대답하면서 목욕탕으로 곧장 들어간다. 드레스를 벗고, 물티슈로 얼굴의 화장을 닦아내면서 동시에 뜨거운 물을 틀어 욕조를 채우기 시작한다. 버블 베쓰 비누 상자를 열고 오렌지색 귤 향이 나는 작은 조각 하나를 뜨거운 물이 콸콸 흐르는 수도꼭지 밑에 살포시 떨어뜨린다. 동시에 비누거품이 거짓말처럼 뭉게뭉게 부풀어 오른다. 발이 뜨거운 물에 닿자 온몸이 포근한 기대감으로 전율한다.
'아! 좋다!'
차갑게 지쳤던 영혼이 삶의 생기를 다시 회복하는 듯하다. 거품 눈사람이 된 채 욕조에 누워 있으려니, 문득 아까 닉에게 카메라 시선이 닫는 자리를 양보했던 생각이 숙정의 뒷덜미를 잡고 누른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한 목소리가 말을 한다.
‘다르게 삶을 살고 싶어. 나 스스로를 지키는 주인공의 삶.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