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내 소원이 하나 있는데..."
천조가 뜬금없는 소원 이야기를 시작했을 땐, 우린 배가 너무 고파 3교시 마치고 10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해치우려고 와구와구 밥을 통째로 삼키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의 입은 여전히 음식을 부지런히 씹고 삼키며, 눈과 귀는 천조에게로 일제히 향했다. 천조는 부산에 온 김에 어릴 때 갔던 바다도 가 보고 싶고 부산 여기저기 구경 좀 다니고 싶은데, 엄마가 주말에도 회사 일만 해서 너무 심심하다는 거였다.
이번 주말에 당장 놀러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집하고 학교밖에 모르는 처지였다. 부산에서 태어났대도 우리 동네를 벗어나면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고, 가끔 나들이를 갈 때도 늘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다녔기에, 선뜻 내가 관광을 책임져 주겠다고 제안할 수가 없었다. 수민이도 서울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찬가지 입장일 터였다.
"내 딴 데는 몰라도 광안리 하고 서면, 부대 앞 정도는 빠삭하거든...구경시키 줄 수 있는데... "
유경이가 약간의 거드름이 담긴, 하지만 돌파구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반가운 대안을 제시했다. 전에 유경이와 그 친구들을 버스 안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와 온천장에 있는 백화점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느그 어디 가노 하는 인사치레 질문에 유경이가 부대 앞에 미팅하러라고 내 귀에만 들리게 솔직한 대답을 흘렸던 기억이 났다. 온천장에서 몇 정거장을 더 가면 부산대학 일대의 번화가가 나온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긴 했지만, 고등학생이 부대 앞에 가서 놀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경이와 장신 친구들은 대학 거리를 배회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긴 머리에 사복 차림을 하고 있으니,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아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련되고 늘씬한 여대생 같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느그 좀 꾸미고 나온나. 그런 데서 너무 고등학생 티 나면 쫌 글타..."
역시나 우리가 유경이 일당들의 분위기에 주눅이 드는 만큼, 그녀는 우리가 너무 꾸미지 않고 촌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꾸미는 거?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 안할라켔는데... 사실 내 창원에서 쫌 날맀다. 여기선 좀 조용히 눈에 안 띌라꼬 노력하고 있는 기다."
우린 다음 날 광안리 바닷가에 나타난, 창원에서 좀 날렸다는 천조의 차림은 가관이었다. 일단 청청 패션에, 목에 빨간 스카프를 동여 매고, 눈두덩이를 총천연색으로 바르고 나온 천조를 보고, 우리는 웃음 폭격에 쓰러져 모래사장을 뒹굴었다. 유경이만 웃음기 하나 없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교복을 벗어도 숱 많은 두툼한 단발머리 때문에 딱 봐도 고등학생인 수민이와, 고등학교 입학 후 교복만 믿고 살았던 탓에 입을 게 없어, 어깨 뽕이 부담스러운 엄마 재킷에 겨울 골덴 바지를 입고 나타난 나를 보고, 혼자 바닷가 풍경에 멋지게 어울리는 살랑거리는 원피스 차림의 유경이는 장르 선택을 잘못한 캐릭터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우리와 함께 어울리기로 한 걸 몹시 후회하는 것 같았다.
"내가 쪽팔리서 안 되겠다. 느그 따라온나."
우리는 유경이를 따라 근처 패스트푸드점 매장 화장실로 들어가, 셋이 줄 서 돌아가며 유경이의 코칭을 받았다. 유경이는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 - 왜 가위를 들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울 엄마 재킷의 어깨 뽕을 잘라내주었고, 실핀을 한 주먹 꺼내더니, 수민이의 짤뚱한 단발머리를 반항기 돋는 커트 머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천조에겐 눈 화장을 지우고, 빨간 스카프를 빼라고 하더니, 그래도 안 되겠는지, 결국은 나와 천조가 재킷을 바꿔 입어야 했다. 그리고 딸기향이 진동하는 립글로스를 꺼내 천조의 빨간 립스틱을 지운 입술에 발라주고, 눈썹 정돈까지 해 주었다. 거울 속엔 아직 자신감이 몹시 결여된 상태의 초보 날라리들이 한 무더기 서 있었다. 물론 유경이는 빼고. 그녀는 고등학생 동생들을 데리고 바닷가 구경시켜 주러 나온 세련된 대학생 언니 같았다.
"와, 바다 좋다. 가슴이 쎤하게 뚫린다 마."
천조는 매장에서 나와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갔다. 신발도 벗어놓고 철벅철벅 밀려드는 파도에 발목을 적시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천조를 보며, 우리도 백사장에 자리 잡고 앉았다.
"땡볕에 앉아 있으면 탄다... 피부 시꺼메지면 진짜 촌시러븐데.. 야, 카페 같은 데 드가서 앉아야지...느그 너무 놀 줄 모른다."
"놀 줄 잘 아는 네 친구들 놔두고, 넌 왜 우리랑 다녀?"
너무 모르는 게 많고, 안 맞는 게 많은 애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 유경이에게, 은근 할 말을 다 하는 수민이가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어조로 물었다.
"느그하고 놀고 싶어서 같이 있는 거 아이다. 대학 가야 돼서. 우리 엄마 소원이다. 느그 같은 애들하고 같이 어울려야 대학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유경이의 대학생 언니 같던 표정이 금세 고민 많은 청소년이 되더니, 진짜 본심을 토했다.
"유경이 니도 대학 가고 싶나?"
"가는 게 좋겠지. 우리 엄마 내 대학 잘 가게 해달라고 맨날 새벽 기도 다닌다. 내 날라리처럼 살았는데, 이제 엄마한테 미안해서 느그들처럼 착해져 볼라고."
수민이와 나는 우리가 착하다는 말에 웃음 폭탄을 맞고 백사장에 드러누워 버렸다. 웃으면서 유경이의 도시락이 떠올랐다. 항상 야채와 과일까지 풍성한 도시락. 딸에게 보통 정성을 쏟는 분이 아니라는 건 짐작을 했었다.
"근데, 결정적으로 우리 안착하다."
"그래도 날라리는 아니잖아. 니는 반장이고, 수민이는 영어 쌤 조카고. 어쨌든 느그는 모범생에 가깝다. 느그 둘이만 맨날 이야기하길래, 잘난 것들끼리만 같이 노네 싶어 낄 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촌에서 온 새 전학생, 낑가 주는 것 보고, 나도 용기를 낸기다. "
"누가 시골에서 왔는데?"
한참 뛰어놀다 피곤해진 천조가 털썩 곁에 주저앉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바로 니"
유경이가 대답하자마자 천조의 얼굴빛이 싸해지더니 벌떡 일어나 유경이에게 달려들어 헤드락을 걸었다.
"머라꼬? 촌? 니 창원에 와 본 적이나 있나? 부산하고 다른 거 없다. 엄청 발달했다, 가시나야! 한 번만 더 촌이라 해 바라!"
"알아따 알아따 촌 아이다 도시다 도시!"
창피와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유경이는 필사적으로 항복했다. 천조가 락을 풀고도, 둘은 얼굴이 벌게져 등 돌리고 앉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나섰다.
"지금부터, 우리 모임의 규칙을 정하겠다. 출신 지역 포함해서 어떤 이유로도 서로를 비하하는 건 금물이다 알겠제."
"외모 비하도 안됨. 촌스럽다, 쪽팔린다 이런 말도 하지 말기."
수민이가 말했다.
"성적 가지고 놀리거나 잘난 체도 금물. 내가 여서 젤 공부 못할 끼다. 그래도 놀리거나 무시하지 마라. 알겠제?"
유경이가 말했다.
"따라 해라. 창원은 멋진 도시다. 촌이 아니다."
우리가 세 번쯤 크게 따라 하자 천조의 뚱한 얼굴에 다시 천진한 웃음이 어렸다.
"우리 규칙 정한 김에 모임 이름도 정하자."
수민이가 떡본 김에 제사도 지내자는 듯 신나게 제안했다.
"일단 머를 하는 모임일지부터 정해야지."
"우리 소원 들어주기 모임 어떻노?"
"소원?"
우리 모두 반문하며 멍하게 바라보자 천조가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 느그가 내 소원 들어줐잖아. 내 소원은 부산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긴데, 오늘 광안리 하나 찍었고! 특히 유경이 덕분에."
"꼴랑 광안리 가꼬 멀 소원씩이나... 또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말해 바라."
아까 락을 심하게 당해 아직 목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는 유경이의 얼굴이 아직도 삐죽거리는 듯해도, 눈에 다시 평소의 명랑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내 소원은 하나 했으니까, 인자 느그 소원 말해 바라."
"난 남친"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낼름 말하는 수민이 때문에 우린 또 깔깔 넘어졌다.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엄마 생각해서 대학. 대학에 꼭 가고 싶다. 공부하는 법 좀 겔카도."
"억수로 소원이 다양하네."
"혜강 반장, 넌 소원이 뭐야."
소원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소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 어떤 장애인 언니가 나를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그 남동생이 누나 소원 좀 들어주면 안 되냐고 나에게 주말에 어디로 나와줄 수 있냐고 편지를 쓰곤 했었다. 나는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이 감당할 수 없게 무서웠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내가 모르는 만큼 나는 불안했고, 내 머리 위에 쏟아진 소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나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예의를 갖추어 답장을 했지만, 늘 핑계를 대고 그들을 만나는 일을 피했다. 때때로 체육시간에 혹은 운동장 조례 시간에 휠체어를 탄 여학생이 저 멀리서 나를 보고 있는 걸 느끼곤 했는데, 그녀가 바로 편지 속 언니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어쩐지 두려웠고 늘 못 본 척, 못 느끼는 척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일도, 나의 소원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도, 나는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다만, 그 순간, 내 소원을 말해도 되는 기회가 왔을 때 나는 무언가 오래가는 것, 확실한 것을 붙잡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난, 우리가 안 싸우고 서로 돕고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대학 가서도 결혼해서도 자주 만나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기 소원이다."
"와 반장 니 소원이 젤 들어주기 어렵다. 완전 장기전인데... 나도 소원 좀 늘카야겠다. 지금은 부산 관광, 나중에는 세계 여행까지 같이 하고 싶다"
천조는 정말 여행에 뜻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침없이 세계 여행을 선언했다.
"나는 대학 마치고 대학원까지 가고 싶다. 공부 진짜 잘해보고 싶다. 엄마 걱정 안 시키는 듬직한 딸로 살아보고 싶다."
유경이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회개하고 새 삶을 결단을 하는 듯 몹시 비장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남친 3명!"
꽤 심각해져 가던 우린 수민이의 말에 또 허파에 바람을 뿜으며 백사장에 쓰러졌다.
"수민이 소원은 내가 들어 주께. 소개팅 시키 주께"
유경이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게 약속을 했다.
"난 소개팅은 좀 부담스럽고, 미팅이 좋은데... 여러 명 중에서 고르는 맛이 있어야지."
"그라든지. 이름은 미팅인데, 실은 니를 위한 소개팅 후보들인 거. 우리는 들러리로 나가서 분위기 잡아 주고."
"나는 들러리를 하든 뭘 하든, 내가 안가 본 부산 명소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하면 찬성"
천조가 들러리 제안에 자신의 조건들을 꾹꾹 다져 넣었다.
"유경이 공부도 도울 겸. 서로 매일 공부할 거 리스트 봐주고, 다 지켰는지 검사받는 거 어떻노? 서로 가르쳐 주는 시간도 가지고."
"역시 반장 아니랄까 봐, 공부 이야기부터 하네. 듬직하다 반장! 나 이렇게 공부 계획 잘 세우는 친구 처음이다! 친하게 지내자 친구야!"
공부 계획을 세우자는 말에 유경이 나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들러붙었다.
"야, 말 돌리지 말고 미팅 계획부터 세워봐 빨리."
"급하네 친구! 그래 급한데 어찌 참았노 지금까지?"
"이렇게 소원이 이루어질 날이 올 줄 몰랐던 거지. 기회가 날아가기 전에 빨리 잡아야지!"
"내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수민이 니."
"그래. 네가 캡이고 짱이야."
"캡, 짱? 머라 씨부리 샀노? 그거 욕 아이제."
"네가 최고 친구라는 뜻이야."
"아...! 맞나! 하하하..."
수민이 남친을 원한다는 건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주변에서 소개팅 미팅을 했다거나, 남친이 생겼다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꽤 들려왔다.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웬지 혼돈으로 치닫게 될지 모를 시작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갑자기 친구들이 여럿 생기고, 그들과 모임을 만들고, 각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일에 끼이게 되는 것... 이게 맞는 길일까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 책상 앞이 아닌 광안리 바닷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내 안의 불안에 불을 활활 지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합석해서 같이 노실래요?"
물어본 사람은 한 사람인데, 빙글거리며 능청스럽게 제안하는 그의 뒤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소리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