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우리 합석해서 같이 노실래요?"
물어본 사람은 한 사람인데, 빙글거리며 능청스럽게 제안하는 그의 뒤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소리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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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풍기는 느낌이 석연찮았다. 아이들 눈치도 그런 것 같았다. 일단 내가 나섰다.
"아니오. 우리끼리 모임이니까 방해 마시죠."
"아니, 우리 만나보면 진짜 재밌는 친구들이에요."
얄팍한 금테 안경에, 무스를 얼마나 처발라 뒤로 머리를 넘겼는지, 일제강점기에서 갓 넘어온 매국노 앞잡이 양아치 같은 냄새가 폴폴 났다.
"우리는 우리끼리 있는다니까요."
"이런 데 왔으면 남녀가 같이 만나 놀아야죠. 광안리 처음 나오셨나. 여기서는 다 이렇게 만나서 노는 거예요. 모르면 오빠야들이 가르쳐 줄게."
계속 거절하는데도 옆에서 이죽거리며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이, 떨어질 뜻 전혀 없는 끈적끈적 찰거머리 한 마리가 달라붙은 느낌이 들면서 불쾌감만 더욱 짙어졌다. 갑자기 천조가 벌떡 일어났다.
"와, 쟈는 일어서니까 너무 짧고 뚱뚱하다."
"짧은 커트, 가는 빼라!"
뒤에 서 있는 남학생들 중 누군가가 함부로 말을 뱉자, 나머지들이 킬킬 거리며 야유하는 소리를 냈다. 천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는가 싶더니, 거의 보랏빛이 되었다. 몹시 위험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못 참겠네. 마! 너거들, 좋게 말할 때 조용히 꺼지라."
"이 언니는 너무 무섭네. 못생기고 성질 더러운 여자는 빠지고, 착하고 예쁜 사람들만 우리하고 같이 놀아요."
금테 안경이 손짓을 하자, 뒤에서 낄낄거리던 놈들이 우르르 다가와 천조를 뺀 우리들의 손목을 낚아채고 끌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들과, 끌고 가는 남학생들에게 파래진 얼굴로 목숨 걸고 달려드는 천조. 모래가 사방으로 튀고 욕지거리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젠, 오전 시간의 바닷가는 한적하고, 놈들이 더 큰 소리로 낄낄거리고 신나 소리치고 있으니, 간혹 이쪽으로 눈길을 준 사람들도 물에 빠뜨리는 장난을 하려는 낭만 가득한 청춘 남녀들의 소동이겠거니 그냥 지나쳤다.
"수민아!"
"강이? 우리 좀 도와줘!"
수민이를 부르는 낯선 남학생의 목소리에, 도와달라는 수민이의 말을 들고 같이 가던 친구들과 힘차게 달려오는 한 남학생의 모습에 나는 넋이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 수록 나는 고요하고 차가운 밤의 강물 같은 그의 두 눈에 온 마음이 빠져들어 버렸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끈질기게 추근대던 불량배들은 간 곳이 없었고, 우리는 수민이 친구라는 남학생 일행의 배웅을 받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이라는 남자 아이의 두 눈이 버스가 떠나는 순간까지 따라왔다.
"와, 머시마들 억수로 멋있네. 쟈 니 남자 친구 아이가? 니 남자 친구 있는데 미팅할라 하는 기가?"
수민이 옆에 앉은 유경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아니야 강이는 최철광 쌤 조카야. 우리 이모하고 최철광 쌤하고 동창이거든. 전에 우리 이사할 때 와서 도와줬어. 짜장면 시켜서 같이 먹고."
"니 남친 아이면 내 소개 시키 달라 할라켔는데..., 최철광 쌤 조카는 쫌... 엮이기가 글네. 패쓰!"
"야. 너 날라리 생활 그만하고 공부한다며. 그리고 강이.. 걔 그렇게 쉽게 친할 수 있는 애 아니야."
"최철광 쌤이 누고? 나도 아는 쌤이가."
천조가 더 이상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몸을 완전히 돌려 뒷자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갓 전학 온 천조가 3학년 선생님들까지는 아직 파악 못했을 터였다.
"3학년 담임인데, 다리 쫌 저는 잘생긴 쌤 있다.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가끔 볼 수 있다. 곧 알게 될 끼다."
유경이 천조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오래 전에 자율학습 시간에 그 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카 이름이 내 이름과 같다고 했던 말. 저 애가 내 이름과 같다는, 최강이구나!
"그 강이라는 아. 인상이 좀 범상치 않긴 해도, 우리 도와준 거 보면 정의롭고 괜찮은 애 맞는 거 같은데. 그 옆에 친구들도 엄청 멋있고. 나는 그 팔에 근육 울룩불룩한 머슴 스타일 머시마 가가 괜찮아 비드라. 야, 우리 아까 가들하고 미팅하면 안 되나."
천조는 언제 그 아수라장 속에서, 마음에 드는 남학생까지 찍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안 친해. 딱 한 번 이사할 때 본 게 다라니까."
"그래도 여기서 니 얼굴 알아보고 도와 준거 보면 니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걔도 내 스타일 아니고. 나도 걔가 오늘 나를 알아본 게 신기해 진짜. 우리 이모가 걔 미술 실력이 엄청 뛰어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 아마 사진 기억력 같은 게 발달하지 않았을까."
최강이라는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 자꾸 남았다. 어딘지 익숙한 눈빛.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집에 와서도, 다음 날이 되어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최강이라는 그 아이, 나와 이름이 같다는 그 아이의 두 눈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교과서를 봐도 창밖을 봐도 끊임없이 그 아이 생각만 났다. 내가 전에 느껴본 적도 통제할 수도 없는 어떤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공간 속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빠져나갈 길을 알 수 없었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내가 조절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이미지 속에서 익사하고 있는 느낌. 딱 그런 느낌으로 답답하고 죽을 것만 같아, 이젠 누군가에게 내 속을 뱉어내야 했다.
밥도 먹지 않고 엎드려 있는 나를 수민이가 쿡쿡 찔렀다.
"너 요새 이상해. 먹순이가 밥을 다 마다하고..."
"내 괴로워 죽겠다 요새."
"왜?"
"자꾸 생각난다. 최강."
"뭔 소리야."
"그때 바닷가에서 우리 도와줬던 네 친구. 최철광 쌤 조카."
"강이? 걔 이름이 최강?... 맞네 최강이겠네... 형님 아들 이랬으니까... 와 어쩜 너랑 이름이 똑같아?"
수민이는 그 애와 내 이름이 같다는 걸 지금 깨달은 모양이었다.
"와 진짜 신기하다. 그니까, 최강이 최강한테 반한 거야?"
"반한 게 아니고, 자꾸 생각난다니까. 그 눈빛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그 느낌이 너무 이상하다.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느낌. 만나봐야 할 것 같은 느낌. 가슴이 답답하고, 쿵쿵거리고, 딱 죽겠다."
"그게 반한 거야, 이 순진한 바보야."
"맞나?"
"우리 반장 상사병 났네. 어째! 내가 만날 수 있게 도와줘야 되는데, 강이 연락처 물어 보면, 이모가 캐묻고 난리 칠 텐데... 근데 내가 듣기로 걔 상처 많은 애라... 내 입으로 남 상처 얘기하긴 싫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들어 봐. 만나면 콩깍지 벗겨질 수도 있고, 일단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만나서 머라 할지도 모르겠다. 떨리고 무섭다."
"아이고 우리 반장. 암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네 소원 들어준다. 이 언니한테 맡겨."
"내 소원이 먼데?"
"니 소원은 최강을 만나는 거야."
"맞나?"
"남의 소원은 다 들어주고 다니면서, 지 소원은 뭔지도 모르는 이 바보."
맞다. 나는 바보인 것 같다. 아무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세상에 던져진 듯한 혼돈 속에서, 수민이가 유일하게 기대고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큰 언니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