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힘들었겠다 너도 (1)

[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by 하트온


최강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렇게 편지를 쓴다. 사과를 이렇게 편지로 하는 것을 네가 허락해 준다면,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 너의 누나에게도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내가 그때 너무 겁쟁이였던 것에 대해, 진심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열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 나는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편지를 쓰다 구겨버리고 또 쓰다 구겨버리기를 여러 번, 나는 편지를 완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아이의 깊은 슬픔의 심연 속으로, 이딴 편지글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데,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사과가 무슨 소용일까. 내 마음 조금 편해지자고 용서를 갈구하는 꼴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아이를 자꾸 만나고 싶은 마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말이 다가와 또 그 아이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설렌다는 자체가 너무 미안했다. 그 아이는 나를 보게 되는 이 시간이 몹시도 싫을 텐데, 누나를 생각해서라도 나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고 싶을 텐데, 함께 있게 되는 시간 내내 괴로울 텐데, 나는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는 자체가 그 아이를 또 다른 방법으로 기만하고 괴롭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약속을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화실로 갈 수밖에 없다.


"오늘부턴 주말에 나가지 마라."


주말이면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기에, 가족 누구도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뜬금없이 아빠가 나를 막고 나선다.


"주말에 동우 공부 가르치라. 글마 수학 성적이 형편없다 아이가. 누나가 돼가지고 니 공부만 하지 말고, 좀 책임지고 챙기라."


나는 순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야 했다. 여기서 어떻게 결론이 나는가가 나의 주말 라이프를 좌우하게 될 터였다. 아버지 앞에서는 웬만하면 '예'가 가장 평화를 지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로 끝나면 내 고교시절이 끝장이다. 큰소리 나는 것을 각오하고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동우 제가 도서관에 데려갈 게요. 거기서 수학도 가르치고 공부도 시키게요."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께요. 누나 말도 잘 듣고."


나는 너무 급해서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치고, 이 놈은 뭔 꿍꿍인지 나를 몹시 거들고 부추기는 눈치다.


"인마 공부 똑디 해라. 다음 성적표도 이 모양이몬, 니 다리 몽디는 뿌사지는 걸로 각오해라. 공부 못해 대학 좋은 데 못 가는 거는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거하고 같다. 이 세상이 전쟁이라는 걸 항상 기억해라. 짜슥아!..."


아빠의 공포 유발 잔소리가 장황하게 이어지긴 했어도, 우리가 나가는 걸 더 이상 막진 안으셨다. 나와 동우는 대문을 닫아 붙이고, 한참을 걸어 버스를 타러 대로변에 접어들고 나서야 속엣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 씨... 니 때문에 내 평화로운 주말이 완전 폭파될 뻔했다. 니 공부 안 하고 어디 정신 파노!"

"아... 씨... 몰라... 마지막에 계산을 자꾸 다 틀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니 난독증 아이가."

"국어나 영어 시험 칠 때는 게안 커든... 근데 수학 시험 칠 때만 눈이 뿌예지면서 마지막에 계산을 잘 못하겠다."

"보통 큰일이 아이네... 인자 네 성적표 나올 때마다 이 난리가 나겠구마..."

"성적표 나온 거 숨깄는데, 쌤이 전화해 가 들키뿟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잘하는데 왜 시험만 보면 성적이 이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집에서 좀 신경 쓰시라고 쌤이 생각해 준다꼬 전화했는데... 집을 한참 잘못 고르싰지. 우리 아빠 성질 알몬 절대 전화하면 안 했을 낀데.... 어설픈 호의가 학대의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는 걸 쌤들은 몰라도 너무 모린다."


그렇다. 우린 그저 오늘도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은 아이들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은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예민하고, 엄하고, 쉽게 불안해하는 성정들이라 안 건드리는 게 나았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는 게 싫어 이미 각자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건 난리치고 호통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우리도 어쩔 수 없고 노력해도 안 되는 문제인 것이었다.


"누나는 좋겠다 학교에서 늦게 집에 와서. 내가 요새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있는지 누나는 모른다. 누나야 진짜 집에서 나가게 해 줘서 고맙다. 오늘 집에 있었으면 하루 종일 감시받으면서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했을 기다."

"그래서, 니 수학 몇 점인데?"

"묻지 마라."

"30점도 안되나?"

"내를 멀로 보노, 40점 넘었다."

"으이그... 내가 니 놀아라고 밖에 데꼬 나온 거 아이다이."

"안다. 그래도 누나하고 도서관에 가는 기, 아빠 저기압일 때 같이 한 집에서 숨 막히는 것보다는 낫다 아이가. 근데, 도서관에 안 가고 어디가노?"


도서관은 집 근처에 있어서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한참만에 깨달은 동우는 눈을 껌벅거리며 맹한 표정을 지었다.


"꿈모임."

"그기 먼데. 와 누나 니, 공부한다고 뻥치고 맨날 광안리 놀로댕깄나?"


광안리행 버스를 잡아 타고, 어디 가는지 설명을 해 주자 나온 동우의 첫마디였다.


"지금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한 거는 사실이고, 오늘부터는 거짓말. 근데 나쁜 거짓말은 아니고. 각자의 꿈을 위해 진짜 공부도 할 끼고. 니도 내하고 같이 자유를 원하면 이 거짓말 무덤까지 덮어라."

"충성!"


눈치 빠르고 상황 판단이 빠른 동우는 어설픈 군인 흉내를 내며, 배신 없는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막상 화실 앞에 도착하니, 여기에 동우를 데려가도 되나 마음이 착잡해졌다. 애를 혼자 길거리에 버릴 수도 없고 다른 도리가 없으니, 일단 동우를 데리고 같이 화실로 올라갔다. 3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선생님들이 공부 가르쳐 주는 진지한 스터디 모임이니, 떠들지 말고 혼자 행동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는 그냥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공부했다고 말하라고 거듭거듭 입조심을 시켰다.


"광안리까지 왔는데, 진짜 바다도 안 보고 바로 공부하러 가야 되나?"

"수학 50점도 안 되는 인간이 바다를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내 수학 50점 넘으면 바다에서 놀 끼다!"

"적어도 70점 받고. 안 그라몬 아빠가 내 발목에 족쇄를 안 풀어 줄 것 같다."

"무슨 족쇄?"

"니를 주말에 달고 댕기야 되는 기 족쇄 아이고 머고?"

"누나 니 엄청 말 심하게 하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바라. 네가 동생이 있는데, 가 공부 못하몬 니가 혼나고 니가 책임지고 공부시키야 된다고 생각해 바라."


할 말이 없는지 동우는 더 이상 대꾸 없이 어느 세월에 70점을 받겠냐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구시렁거리며 따라오던 동우는 화실 안에 처음 보는 어른들과 누나들이 가득한 것에 움찔 기가 눌리는 듯했다.


"제, 동생인데예..."


나는 모두에게 동우를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설명을 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누나 최강 동생 최동우입니다. 잘 부탁합니데이."


붙임성이 제법 있는 녀석은, 낯선 사람들에게 잘도 방실거리며 인사를 했다. 집에서는 지 밖에 모르는 놈이, 밖에 나오면 저렇게 예의 바른 척을 하는 것이 영 꼴같잖았지만, 언제부턴가 결국 내 소중한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린 시절에 느꼈던 미움이나 거부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잘 왔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는 최철광 수학선생님이다."

"난 김영애. 영어쌤이고. 쿠키와 케이크도 만들어 주는 사람. 동우 넘 귀엽다! 이름도 멋진데!"

"와, 동생 억수로 반갑다! 난 누나 친구 혜리 누나다."

"나는 유리. 동생 멋있네!"

"반가워, 동생. 우린 전에 봤지? 혜민이 누나라고 불러 줘."


쌤들과 천조와, 유경, 수민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반갑게 인사했다. 수민이 누나가 왜 혜민이라고 불러달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사람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해 오고 정신이 없으니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강아 여기 와서 동우 동생하고 인사해. 혜강이 동생이래."


밖에 심부름을 나갔었던 모양인지, 큰 박스 하나를 들고 지금 막 화실 입구에 들어서는 최강을 최철광 선생님이 손짓하며 불렀다.


"와, 행님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여기 누나들만 있는 줄 알고 완전 쫄았다 아임니꺼. 근데 행님 완전 키도 크고 잘생깄네요. 나도 행님만큼만 키 컸으몬 좋겠다."


동우가 최강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아부를 떨었다. 자기가 서야 할 줄이라고 생각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끼어들 줄 아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내가 저를 미워하며 몹시 밀어내었던 것이 녀석에게는 밀어붙이고 들어가는 접착력을 키우는 훈련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강은 다소 당황하는 듯했지만, 살살거리는 동우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진 않았다.


"어... 반가워."

"이제부터 동우를 네 친동생이다 생각하고 잘 챙겨라."


최철광 선생님은 동우가 무슨 최강에게 사 준 반려견이나 갓 낳아준 아기 동생이라도 되는 느낌으로, 잘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동우도 엄마 오리를 만난 아기 오리처럼 최강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순간 얼핏 스치는 동우의 희미한 미소에 나는 가슴이 찌릿했다. 여학생들 틈에서 설 자리를 몰라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최강이 동우와 함께 모임 안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에 나는 기쁨이 샘솟는다 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딘가 환한 곳으로 문이 열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 최강의 슬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