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어린 왕자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가 그린 그 그림을 이해하는 어른이 없었고, 이해를 한 후에도 어른들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잡념은 걷어치우고, 돈벌이가 되는 학문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막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만났을 때, 그 소중한 존재가 어른이 된 아이에게 원하는 것은 그림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자꾸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들려했다. 내가 최초로 그렸던 그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기억하는 최초의 그림은, 동네 언니들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던 공주 그림이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호수 같은 눈동자, 화려하면서 동시에 기품이 넘치는 고동 머리, 리본과 레이스로 빈틈없이 장식된 예쁜 드레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들이 무엇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순정 만화라는 것의 그림이 하나 같이 서양 귀족 여성의 모습이었다. 나도 순정 만화라는 것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빌려다 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은 그 순정 만화 한 권으로 몹시도 추락했었다. 남자가 구해주어야만 제대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여성. 만화를 보는 내내, 저 남자가 저 여자를 좋아해 주어야 할 텐데, 결혼해 주어야 할 텐데,... 하는 내내 안타까운 감정. 그리고 현실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너무 멋진 왕자님들. 만화 세상과 현실과의 괴리 앞에서 내 어린 정서는 휘청거렸고, 다시는 공주 따위를 그리지 않게 되었다.
예쁜 것을 그리고 싶었으나, 예쁜 것이 예쁜 이유가 몹시도 비참했다. 또한 예쁜 것은 금방 시들어 버리는 한계 앞에서 나는 절망했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예쁜 것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나는 가끔 나무를 끄적거렸다. 나무는 계속 자란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고, 앙상한 가지 따위 대충 그려도, 물감을 톡톡 찍어 초록색 잎사귀들로 무성하게 덮어 버릴 수가 있었다. 나무는 예쁘지 않고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 흠이 있어도 괜찮아 보일 뿐 아니라, 더 진짜 나무 같아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나무에 감정 이입을 하곤 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바람에 하염없이 휘둘리는 나무를 보면 나는 눈물이 났다. 어딜 가도 나무를 세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곳의 나무와 저곳의 나무가 어떻게 다른지. 열매와 잎사귀, 나무껍질의 패턴을 손으로 느껴보고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나무가 잘 있으면 나도 잘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나도 그렇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랄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최강은 무엇을 그릴까. 그 애의 그림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 애가 그려주었던, 내 중학교 시절 그림들이 생각났다. 그 아이는 나를 관찰하고 나를 그렸다. 제 누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무엇이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이 강풍에 휩쓸려 몹시 휘청이는 나무처럼 생각되었다. 누가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누가 나를 끌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학교에 하루 종일 갇혀있는 것부터 나의 의지가 아니다. 다만 이 학교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고, 모르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 건물에 갇힌 삶을 수긍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일까. 왜 세상은 성적순으로 서열을 나누는 것일까. 왜 선생님들은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처럼 다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도와주고 가르쳐 주는 두 분의 선생님들을 존경하면서도, 내 인생은 그분들 인생처럼 험한 꼴 안 당했으면, 그분들처럼 뒤늦은 꿈을 꾸지 않았으면, 그분들과 다르기를 바라는 내 위선을 보았다. 그 마음이 문득 내 안의 무언가를 찔러, 나는 끄적거리던 나무 위에 마구 엑스자를 이리저리 그어 그림을 덮어 버렸다.
나는 최강의 슬픔을 모른 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런 아픔을 당한 것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아이와 아무 상관이 없으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불운과 불행과 슬픔을 남의 것이라고 관조할 수만은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을 내 마음의 일부러 허용하는 순간, 나는 나의 아버지를,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집안 어른들을, 배신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수학과 영어, 국어와 역사로 채워야 할 마음에, 쓸데없는 보아뱀 그림을 이어가는 마음 낭비 시간 낭비하는 어리석은 아이가 되어 버리는 책임을 내가 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이미 쏟아진 물이고, 세차게 흘러내리는 폭포수였다.
나는 그 애를 생각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나는 흘러 무엇이 되고 있는 걸까. 달달 외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은 입시 교육의 틈 비집고 들어오는 보아뱀 그림의 끝은 무엇일까. 아버지를 배신하는 딸, 어른을 배신하는 아이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배신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나는 원래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일까.
나는 늘처럼 근엄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문득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을 했다.
"아빠가 사회 돌아가는 걸 잘 관찰해 보니까, 여자는 교사나 약사가 되는 게 결혼하고도 경제력을 가지기에 좋을 것 같다. 교대를 가든지 약대를 가라."
아버지가 나라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나무를 부러뜨릴 수도 뽑아서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버지가 어떤 계획을 세워도,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흐르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흐를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울어 좋을 일은 없었다. 눈물이 쉽게 솟구쳐 오르는 나이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몸이 절로 방어하며, 눈물을 내면 깊숙한 우물 속으로 밀어 넣을 줄 알았다. 아버지 앞에서 숨긴 눈물의 늪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책가방이 옆에 있어 다행이었다. 가방을 열고 교과서를 꺼내 시선을 파묻고 차단시켰다. 교과서가 펼친 글자들, 내용들이 무엇이건, 내 눈에 드러나는 것은 그 애의 눈빛, 그 애가 한 말들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