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의 보아뱀 그림(2)

[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by 하트온

요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아빠가, 혹여나 문을 막고 잔소리를 늘어놓으실까 두려워, 동우와 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누나야, 내 배고프다."


요즘 한참 자라는 시기인지, 하루에 몇 끼를 먹는 데다, 매일 아침 엄마가 차려주는 고봉밥을 먹고 학교에 가는 게 버릇이 된 동우는 집을 나서자마자 꼬르륵 소리로 골목길을 울리며 배고프다고 칭얼댔다.


"머 물래? 근데 아침에 여는 데가 없을 낀데."

"누나야 한 군데 있다."

"어디?"

"던킨 도나쓰 우리 동네에 들어왔는데, 거긴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한다."

"니 우째 그리 잘 아노?"

"엄마가 한 번씩 사준다."

"니만!"

"누나는 학교에서 늦게 오잖아. 그리고 누나도 먹어 봤을 건데, 엄마가 누나 밤에 오면 준다고 여러 개 사던데."


생각해 보니, 뭔가 특이한 걸 먹은 기억이 났다. 속에 딸기잼 같은 게 들어있고 밖엔 하얀 가루가 붙어,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없었던 그 도넛인지 빵인지 정체불명의 무엇.


"아. 그거. 기억난다. 엄청 단 거 그거. 그게 던킨 도나쓰라 카는 기가?"

"어. 누나는 학교 다니느라 잘 모르겠지만, 그기 요새 완전 대박 인기다. 줄 서서 묵는다. 그거 사도."

"아침부터 단 거 물라꼬."

"외국에서는 아침밥으로 그런 달달한 거 묵는다 카더라. 우리도 오늘은 외국 스타일로 아침 묵자."


뼛속까지 한국인인 내 몸은 아침부터 단 걸 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동우 말대로 우리 동네에 주말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고 음식 파는 집은 정말 그 도넛 집 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수긍한 나는 동우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 주말인데 아침부터 공부하러 가나?"


아주머니가 던킨 도넛 로고 색과 비슷하게 진분홍색 블라우스에 감색 바지를 입고 우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동우는 흰 가루가 발라진 도넛을, 나는 아무것도 발라지지 않은 꽈배기처럼 생긴 도넛을 골라, 우유와 함께 먹었다.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찬 우유 먹으면 배탈 날 수 있다고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주신 덕분에 따뜻한 흰 우유와 달달한 도넛의 환상 조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너무 맛있다! 와... 진짜, 너무 맛있다! 따신 우유가 신의 한 수다!"


동우는 맛있다는 소릴 연발하며 허겁지겁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그리곤 한참을 내가 먹는 동안 앞에 멀뚱멀뚱 앉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녀석이 말을 시작했다.


"누나야, 내가 왜 수학을 마지막에 가서 다 틀리는지 알 것 같다."

"왜?"

"꼭 잘해야 한다는 마음과 나는 못할 거라는 마음이 미친 듯이 싸우는 기라, 마음이 막 싸우면 심하게 긴장이 되고 문제를 풀기도 전에 마음이 너무 지치뿌는 거지. 문제를 풀다가 졸리는 것 같은 현상이 오고 정신줄을 나 뿌는 것 같다... 눈이 멍해지가 문제를 잘 못 읽고, 끝까지 잘 마무리도 못하고..."

"왜 그리 마음이 싸우고 긴장하는데."

"내 어깨에 다 걸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무겁고 무섭다. 그리고 내가 돌대가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 그런 생각하노?"

"내가 태어나서 아빠를 만족시킨 적이 한 번도 없는 거 아나. 누나 때문인 것도 있다. 항상 누나가 기준을 너무 높여서 누나만큼 못하면 내가 바보 취급받는 거지. 어쩌면 내가 진짜 돌대가린지도 모르고. 내 딴에는 정말 열심히 하거든. 내 만큼 공부하는 중학생 별로 없다. 다른 애들 배로 공부한다고 하는데도, 수학도 그렇고 성적이 점점 떨어지니까 그게 내가 돌이라는 증거지."


아빠는 우리 둘 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향하는 뜻 각각은 몹시 다르게 들린다. 나에게 공부를 잘하라는 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기보다 결국 형편 부유하고 좋은 집안에서 탐낼 조건을 갖추고 시집을 잘 가서 나중에 동생도 집안도 도우며 살아라는 소리였다면, 동우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소리는, 집안의 명예와 부를 번듯하게 세울 만큼 공부를 잘 해내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판결문처럼 들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동우의 성적표는 몹시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 같았다.


내 마음, 내 감정만 생각하느라 동우의 입장까지 생각할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늘 이 아침에 문득 동우가 느끼고 있을 부담감이 마음으로 훅 느껴졌다. 이 아이의 떨어지는 성적은, 이 아이의 정신이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아파왔다.


"나는 아빠 신경 안 쓰고 내 길 가기로 했다. 그게 나중에 아빠한테 배신이 될 지라도."

"와... 누나 니는 억수로 용감하네. 나는 그게 안된다. 내가 마음에 들게 안 하면 아빠가 나를 죽일 것 같다는 살벌한 느낌이 든다 나는. 너무 떨리고 무섭다."

"아빠가 니 때릴라 카든지, 힘들게 하면, 내가 막아 주께."

"어떻게?"

"어떻게든 지켜주게."


외국 사람 같이 달달한 아침을 잘 먹고, 동우는 갑자기 짜디짠 눈물을 질질 짜기 시작했다.


"아..씨...남사시러버라. 한 데서 울지 마라."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데 어짜노?"

"왜 동생을 울리노, 아침부터."


주인아주머니가 우유 한 잔을 더 데워, 동글동글한 도넛 네 알과 함께 동우 앞에 놓아주셨다.


"이건 아주머니가 그냥 서비스로 주는 거야. 앞으로 자주 오라고. 이게 이번에 새로 나온 종류인데 정말 맛이 괜찮아 먹어 봐. 누나하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

"고맙습니다."


언제 울었냐며, 동우는 다시 헤벌쭉한 얼굴로 우유와 탁구공 만한 도넛 2개를 게눈 감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 네가 다 무라."

"그래도 되나, 누나야."


동우는, 답을 기다리지도 않을 질문만 던져놓고 나머지 도넛 두 개를 마저 제 입에 쏙 넣었다.


"누나가 볼 때 니하고 내는 더 놀아야 된다. 지금까지 너무 무섭다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우리 진짜 마음을 잃어버리고, 바보가 돼 가고 있는 기다. 주변 친구들 보니까, 사람이 놀 줄도 알고 자유롭게 지내야 꿈도 생기고, 꿈이 있어야 정말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것도 생기는 것 같더라."

"그래도 누나는 공부 잘하잖아. 나는 누나만큼만 공부 잘하면 걱정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시험만 잘 보고 성적만 좋은 기다. 내가 공부를 좀 하는 이유는 지는 기 싫어서일 뿐이다. 경쟁심만 있지 꿈이 없다. 그기 심각한 내 문제다. 어디로 가야 될지...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하기만 하다."

"누나야, 내 생각에 나는 꿈 비슷한 기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나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 내 그림 함 볼래?"


동우가 가방을 뒤적여 연습장을 하나 꺼냈다. 동우가 앞에서부터 한 장 한 장 펼치는 페이지마다 만화 그림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와... 니는 진짜로 꿈이 있네! 꿈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도 하고 있었네!"

"이런 것도 꿈이 될 수 있나 누나야? 아빠가 알면 미칬냐고 내를 직일 낀데......"

"들키지만 말고 그림 계속 그리라. 대신 공부할 땐 공부하고. 누나가 보니까 니 분명히 재능 있는 것 같다. 진짜! 내 형제를 평가하는 일에는 가차 없는 거 알제."

"알지! 나는 아까부터 누나가 '이것도 그림이가! 때리 치아라' 이랄까봐 조마조마했다."


요즘따라 내내 근심이 가득하던 동우 녀석의 얼굴이 화려한 던킨 조명 아래 오랜만에 발그레한 빛을 뿜었다. 녀석은 자신의 보아뱀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어른들에게 인정받겠다고 어설프게 덤비지도 않고, 잘도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녀석이 훨씬 실속 있게 자신을 지켜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이 40점이 되건, 성적이 떨어지건,... 그건 이 아이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성적이 떨어지는 걸 감수하며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


나는 성적을 지키느라, 어릴 때의 동욱이를 비롯해 나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을 이기겠다고 용심을 쓰느라, 그 사이 진짜 나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수학과 영어를 마음이 메말라버릴 때까지 욱여넣는 사이 모든 꿈이 빠져나가 버린 건 아닐까. 찾을 수도 없게 다 증발해 버린 건 아닐까.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내 꿈은 과연 어딘가에 살아 있기나 할까. 더 이상 동욱이 녀석 따위 불쌍하지 않았다. 어딘가 낯선 곳에서 헤매고 있을 내 꿈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젠 내가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줌마가 도넛과 우유를 공짜로 더 줘야 하나 부담을 느끼실까 봐, 동우 녀석을 잡아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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