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주말 이른 아침 화실의 분위기는 적막 그 자체였다.
"지금 여 우리 말고 아무도 없겠제?"
동우는 혹시나 싶은지 속삭이듯 말했다.
"몰라. 어쨌든 사람들 올 때까지 조용히 공부하든지 만화 그리든지 해라."
"오예... 학교에선 쌤들 눈이 무섭고, 집에선 가족들 눈이 무서븐데, 주말에 여 일찍 와서 그림 그리면 되겠다."
"그래. 여서 마음 놓고 그리라. 누나가 응원해 주께."
녀석이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나 싶었더니, 좀 있다 쪽지 하나를 접어 나에게 던졌다. 펼쳐 보니, 다정한 남매 그림이 있고, 그림 속 남동생 입에서 나온 말풍선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누님도 파이팅! 누나 꿈 찾게 되면, 나도 지지하고 응원해 주께요!"
종이를 접어 필통에 넣고 나는 다시 화실에 내려앉은 적막을 기회로 <어린 왕자> 지난번에 읽은 뒷부분을 이어 읽기 시작했다. 비행기 조종사 화자가 사막에 떨어진 지 5일째 되는 날. 꽃의 가시의 의미를 놓고 글의 화자인 어른과 어린 왕자다 다투는 대목이었다. 어른은 갖고 있는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타고 온 경비행기를 고쳐야 해서 바쁜데,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양을 데려가면, 잡초뿐 아니라 혹시 꽃도 먹을 건지 물었다. 아저씨가 양이 모든 것 안 가리고 먹을 거라고 대답하자, 그럼 가시 있는 꽃도 먹을 건지 묻고, 당연히 가시 있는 꽃도 뜯어먹을 거라고 하자, 그럼 꽃에게 가시가 무슨 소용이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힌 어른은 비행기 고치는 일이 잘 안 풀려 짜증이 난 상태에서 꽃의 가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고, 그냥 꽃이 못됐게 구는 한 방법일 뿐이라고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 그 말은 어린 왕자를 몹시 화나게 했고, 꽃은 약하고 순진한 생명체이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힘을 고양시키는 당연한 노력을 할 뿐이라고, 자신의 가시가 스스로를 강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것이라고 쏘아댔다.
그 대목을 읽는 내 가슴이 떨려왔다. 나에게 나기 시작하는 가시, 아버지를 대적하여 내 꿈을 찾고 동우의 꿈을 지켜 주려하는 내 마음의 가시가 배은망덕하고 못된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동안 괴로웠었는데. 어린 왕자가 나를 지켜서 보호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내 힘을 키우는 당연한 노력이라는 말이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내 입지를 지키기 위해 내 가시를 자라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수를 다 써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북돋우는 것이었다.
"누구게?"
혼자 울컥해 있던 그 순간, 누군가 내 눈을 가리고 목소리를 변조해 냈다. 목소리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서울말 억양과 히히 거리는 웃음소리로 나는 금방 장난치는 주인공이 수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중에 남자 친구 젤 처음 생길 아!"
수민이는 금세 장난을 멈추고 옆에 앉아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어제 소개팅했다!"
"니 소개팅은 안 한다면서. 선택지가 너무 적다매!"
"근데, 내가 콕 찝어둔 애 하고 소개팅을 할 대망의 기회가 온 것이지!"
"맞나!"
"아니, 때리진 않아."
"진짜 함 맞아 바라."
나는 유머랍시고 내가 '맞나' 대꾸할 때마다 저렇게 받아치는 수민이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 수민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짜 잘생기고 키도 크고 다 좋았는데... 밥 먹고 좀 걷기로 하고 일어서는데... 딱 깨는 걸 봤어."
"뭐를 밨는데?"
"지퍼가 열려 있는 거야."
"남대문이 열맀더라 이 말이가."
"어. 스마트한 이미지가 확 깨지는 거야. 말도 못 해주겠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그기 뭐 어때서."
"그래도.
순간 동우가 저쪽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의식한 수민이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동우에게 다가갔다.
"안녕 동우 동생! 와! 이거 네가 다 그린 거야?"
동우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잘 그리네! 엄청 재밌을 것 같아! 누나가 읽어 봐도 돼?"
"뭘 읽는데?"
김영애 선생님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한꺼번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선생님들과, 최강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이 우르르 들어와, 동우의 그림을 둘러싸고 섰다.
"우리 동우, 이런 그림 실력이 있었어?"
김영애 선생님이 화사하게 웃으며 바라봐 주고, 누나들이 옆에서 진짜 잘 그린다고 수선을 떨어주니 동우 녀석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 좋아하는 만화 있어?"
최강이 동우의 만화에 관심을 보이며 나섰다.
"공포의 외인구단 하고 드래건볼, 그리고 슬램덩크도 좋아하고,..."
"그 만화책들 다 봤어?"
"저희 집이 좀 엄해서, 만화방에는 못 가봤고, 친구가 학교에 만화책 들고 올 때, 좀 보그든요. 애들이 우리 집 사정 알아서 잘 비 주긴 하는데, 쌤들 눈치 때문에 대놓고 마이는 보기 힘들고요."
"형네 집에, 네가 말한 만화책들 지금까지 나온 거 다 있고, 다른 것들도 좀 있는데... 담 주에 화실에 갖다 놓을게."
"진짜요!"
동우의 눈이 평소보다 3배는 커졌다. 만화가들이 그리는 왕방울만한 눈에 맺히는 초롱초롱한 빛이 동우의 눈에도 맺혀 있었다. 인간의 눈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우리 누나도 만화책 엄청 좋아했거든. 나도 그거 보면서 만화 엄청 그렸고..."
"행님, 사랑합니데이! 행님은 제 꿈을 키워주는 은인입니데이! 앞으로 평생 잘하겠심니다!"
동우가 최강을 끌어 안자, 동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좀 떨어지면 안 될까. 난 스킨십은 별론데."
"최강 5학년 이후로, 우리 집안 누구도 최강 안을 수 있는 사람 없는데, 그 어려운 걸 동우가 해냈네!"
최철광 선생님이 두 남자 녀석이 격렬히 포옹하고 있는 걸 보고 껄껄 웃었다.
"행님이 그린 만화도 꼭 보이 주이소."
최강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 애는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최철광 쌤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왜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게 된 것일까. 혹시 나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전혀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과거의 사건들이 그렇게 작용했을 확률이 1%라도 있다면, 나는 그 1%라도 바꾸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크게 숨을 들이키며 용기를 내 보았다.
"최강 나도 네 그림 보여 주라. 그림 잘 그린다는 소문이 자자하데."
"우리도. 우리도 보이 도!"
"우리도. 우리도 꼭 보여 줘야 돼!"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멤버들이 입을 모아 저희들에게도 그림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아이들의 요구가 떨어지자마자, 쌤들도 보여달라고 응석 부리듯 말했다. 왁자지껄 웃음이 터져 나오며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지만, 최강은 감당이 안되는지, 그림 작업실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