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도한 '도둑년'
타운하우스 '파르테논'은 신도시 '진원'에 소재한 주거단지다. 편의 시설이 다 갖추어진 아파트의 잇점과, 층간 소음이 없고 자기 마당과, 넓은 테라스를 가질 수 있는 독채의 장점을 다 가진, 집들이 옆으로 이어진 형태의 건물 구조였다. 3층집이 다섯 채씩 붙은 크림색 건물 다섯 동이 큰 정원을 둘러싸는 6각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집 건물들 사이, 6번째 면은 단지로 들어오는 입구로, 성 같고 5성급 호텔 같은 클럽 하우스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세워져,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심리적으로 압도당한 상태에서 꼼꼼히 신원을 확인하는 규정을 따르게끔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었다. 또한 클럽 하우스는 입주자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서재 방과, 모임을 할 수 있는 회의실, 영화관, 수영장, 짐, 카페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파르테논 주민들 사이의 다양한 모임과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계획된 공원도시인 만큼, 어디에 살아도 산책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동네와 동네 사이, 길과 길 사이를 빽빽히 채운 울창한 숲이 파르테논을 둘러싸고 있어, 숲속 리조트 휴양지 같은 분위기까지 가미되어 몹시 쾌적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물론 그 모든 혜택은 관리비라는 이름으로 부담지워지는 법이었다. 관리비만 일반 아파트의 배를 넘기에, 매달 여유로운 수입 없이 입주할 마음을 먹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또한 수도권에서 좀 거리가 있다는 점도 이 지역에 사람이 크게 몰리지 않게 하는데 한 몫했다.
오정순은 파르테논에 이사올 때즈음부터 오세라라는 가명을 썼다. 여러 가지 불편함 때문에 정식 개명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오세라로 개명을 한 것처럼 말을 흘렸다. 세라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부인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많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이 그러하듯 세례명이겠거니 했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녀가 전엔 천주교 세례를 받은 적이 있겠거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순이라는 이름은, 어릴 때 아침에 눈곱도 못 떼고 오빠들 학교 가기 전에 밥을 짓기 위해 군불 불씨부터 살리려고 얼굴이 시커멓게 되도록 아궁이 앞에서 애를 태우던 어린 시절이었다. 흰밥에 계란은 아빠와 오빠들 차지고 저는 고구마와 밥을 섞어야 했던 깊은 산촌 부엌데기 이름이었다.
오세라라는 이름이 주는 힘은 달랐다. 이국적이고 세련된 이미지가 여기 파르테논 분위기와 맞았고 여기서 어울리게 된 교양 있는 사람들과 맞았다. 또한 이곳이 비교적 수월하게 입학이 가능한 외국인 학교가 있는 학군이다보니,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나 외국인들이 많고, 덕분에 다양한 국적의 식당, 카페, 식료품점등이 들어서면서, 도시 전체가 유럽의 어느 거리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과도 맞았다. 무엇보다 어느새 시골 사람 티가 전혀 나지 않게 된, 명품으로 꼼꼼히 장식한 자신의 세련되고 귀티나는 외모와 가장 잘 어울렸다.
파르테논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 정순의 인생에 일어난 가장 멋진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파르테논 입주는 부지런하고 수완 좋은 남편이, 늘 주눅 들어 인상을 찌푸리고 사는 아내 오정순을 세우고 만족시켜주고 싶은 남편이 일구어 낸 쾌거였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남편의 직업을 궁금해할 때 오정순은 언제나, 사업가라고 얼버무렸다. 남편의 직업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자신이 겨우 만들어 낸 이미지가 무너질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학벌을 넘어서는 지식과 교양을 갖춘 느낌이 드는 여기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 가장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정순이 이 타운하우스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훨씬 전, 윤정아는 이 신도시가 아직 건설 초기 단계일 때부터 이 지역에 들어왔던 초기 멤버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이 파르테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동향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고, 어느새 딱 25채 집이 있는 이 타운에서 모르는 사람 없는 터줏대감이 되어 있었다. 이사 오는 모두가 모르는 것을 윤정아에게 묻고 싶어 했으며, 어느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센스 있어 보이는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윤정아는 윤지나라는 미국 유학 시절 만든 닉네임을 썼다. 항상,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정치인 자녀 교육 비리 뉴스의 한가운데서 돌리며 마녀 사냥을 당해왔던 그녀는, 외국 유학 시절부터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기 시작해서, 지금 현재 윤지나가 그때 뉴스에 오르던 국회의원의 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연결 짓지 못했다. 다만 그녀를 알아보는 동창들과 지인들을 피하여, 서울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고, 그녀는 이 신도시의 타운하우스를 선택했다. 유명대학 교수 자리까지 만들 수 있는 힘 있는 아버지였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가 부담스럽다는 딸의 눈물 호소에, 아버지는 자신의 욕심을 깨끗이 비우고 이곳 신도시 가까이 이름 없는 대학교 강사 자리에 그녀를 꽂아 주었다.
윤정아는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고 여기서 조용히 새로 시작한 삶이 평화롭고 좋았다. 그리고 이젠 뿌리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숨어 다니는 느낌이 더 이상은 싫어서, 여기에 들어온 이후에는 좀 더 자신을 드러내고, 다시 태어난 윤지나라는 이름으로, 음악인으로서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윤정아는 자신이 18세기 유럽의 문화 예술 살롱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종종 모임을 주도했다. 그녀가 나서서 이끄는 동네 모임은 그냥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수다나 떠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친목 자리에 나와 줄 사람들도 없으려니와, 그녀 자신이 문화 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런 자신의 수준을 맘껏 드러내는 음악회를 주도했다. 윤정아 본인이 피아노 연주자로서 클라리넷이나 플루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 하는 다른 입주인들과 함께 듀엣이나 트리오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중에서도 윤정아가 가장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은, 김소은이라는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그녀는 음악 연주자 일뿐 아니라, 꽤 유명한 변호사의 부인이자, 최근 책까지 출간했다는 작가였다. 윤정아가 느끼기에 김소은은 자신과 가장 맞는 수준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만족감이 있었고, 뭔가 이 사람에게는 힘든 마음을 열고 상담을 할 수도 있는 편안함, 성숙함 같은 것이 있어 자주 만났다. 특히 윤정아가 동경했던 부분은, 김소은이 타운하우스 입주인 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여는 독서 모임이었다. 그녀의 북클럽에서 읽는 책들은 대부분, 철학과 고전 문학서였는데, 북클럽이 계속 진행될수록, 김소은에 대한 주민들의 평판과 이미지는 날로 좋아졌고, 윤정아는 그런 지식인 상류층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이 내심 흡족함을 주는 구석이 있어, 그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정말 이 책을 좋아해서 참여하는지, 변호사 마누라 한 사람쯤 친하게 알아두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서 모임엔 꽤 꾸준하게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 독서 모임을 가장 빛내는 멤버는, 클로이 킴이라는 여자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왔다는 이 여자는 정말 귀족, 지성인, 이런 단어들의 결정체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로, 손짓 하나부터 목소리 톤까지 우아한,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어 아무도 질투 조차도 들지 않는 여신이었다. 클로이 킴은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소설에 이르기까지, 어떤 책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막힘이 없었다. 누군가 어쩜 학식이 이렇게 풍부하냐고 칭찬을 할 때마다, 남편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집에 늘 혼자 있어 너무 무료해서 책을 읽다 보니 그런 것이지 그렇게 칭찬할 정도로 많이 아는 것은 아니라며 몹시도 우아한 손사래를 치곤 했다.
또한 클로이 킴이 취미로 하는 것이라며 모임에 만들어 오는 간식거리들이 너무나 유럽스럽고 고급스러워서 모두 입을 모아 경탄과 칭송을 늘어놓곤 했다. 젊은 여자가 혼자 화려하게 사는 것을 보고, 그녀가 갓 입주했을 땐, 혹시 재벌이나 정치인사의 첩이 아닌가 의심을 품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학식이나 취미가 너무도 고상한 것이 점점 드러나면서 오히려, 신분을 숨기고 사는 재벌가의 딸이 아니겠느냐는 소문으로 정리가 되었다.
독서 클럽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평소 다른 곳에서 만날 일 없던 이 네 여자가 자주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각자 나름의 만족감을 채우는 우정이 아테네 한가운데서 꽃 피고 있었다. 나이 지극하고 학식 풍부한 어느 50대 남자 입주인이, 이 30대 중반의 재능 있고 아름다운 젊은 부인들에게 '파르테논의 뮤즈'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by (by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