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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Feb 03. 2023

무시무시한 총각김치의 저주

겨울 총각김치 절대 담그지 마시옷!

엄마가 지난달에 배추김치를 담고 양념장이 좀 남았다며, 총각김치를 담그자고 총각무를 여러 단 사 오셨다. 총각김치 마니아인 나는 담그자마자 바로 맛을 보았는데, 아직 익지 않은 데다 무가 쌉싸름하게 매운 것이 좀 별로인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잊었다.


몇 주쯤 지났을까.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총각김치 잘 익었나?


또 맛을 보았다. 빛깔이나 향은 제법 그럴듯한데, 아직 속은 맵고 쌉쌀한 생무 그대로였다. 아직 하나도 안 익었다고, 엄마에게 답장했다. 그리고 또 몇 주나 흘렀을까.


어느 날 한밤중에 한참 잊고 있었던 총각김치가 갑자기 떠올랐다. 냉장고 구석 안쪽에서 자고 있던 총각김치를 살며시 깨워보았다. 조심스레 다루었음에도, 뚜껑을 열자마자 누구나 짐작할만한 무 푹 익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팍' 하고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총각김치가 제대로 익었음을 예고하는 군침이 입안 가득 퐁퐁 샘솟았다.


시각은 야심한 11시. 이미 냄새로 발동 걸린 먹이 찾는 맹수 본능은 자제할 길이 없었다. 밥통을 열어보니, 몇 시간 전에 불을 빼서 미지근한 흰 밥이 한 공기 정도. 반공기만 먹어야지 하며 겨우 발휘된 절제력이 선택한 작은 종지에 밥을 담고, 마침내 이성을 되찾은 양심덕택에 김치는 두 조각만 얹었다. 쌉싸름한 무가 익어 이렇게 매력적인 맛이 될 줄이야! 드디어 피맛을 본 뱀파이어! 참을 새도 없이 후루룩 삼키고, 말릴 새도 없이, 나머지 밥을 마저 퍼 담아, 김치 세 조각 더 얹어 식탁에 앉았다. 밥 한 번 김치 한 번, 밥하고 김치 동시에, 김치 한 입 베어 물고 밥으로 균형 잡기, 밥을 김에 싸서 충무김밥처럼 먹기. 흰밥과 총각김치로 낼 수 있는 온갖 맛의 조화를 다 부려가며, 정말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다음날부터 밥을 할 때, 한 컵 정도 쌀을 더 추가하고 있는 나. 배가 조금만 꺼지는 느낌이 들면, 밥과 총각김치를 떠올리고 기뻐하는 나. 한 끼에 밥을 2 공기씩 먹는 나. 사이사이 간식과 야참까지 밥과 총각김치 궁합으로 맞춰 먹어야겠는 나. 요 근래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은 확실히 저주, 총각김치의 저주에 제대로 걸려든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20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이 저주에 걸렸을 때 어떻게 빠져나왔더라? 그때, 이모가 시원한 국물까지 기가 막히게 맛있는 무 김치를 담가주셔서, 하루 종일 무김치와 밥만 먹으려 들었던 날들이 생각났다. 유학생이 한국 음식을 잘 못 먹다가 방학 때 찾아간 친척집에서 무 김치의 저주에 제대로 깊이 독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도리가 없었다. 그냥 김치가 동나야만, 신데렐라 12시 종이 울리고, 허리 사이즈가 한 두 치수 정도 늘어나 바지 단추를 잠글 수 없는 처참하고 누추한 몰골로 끝이 나는 게 어김없이 정해진 말로였다.  


무 김치 총각김치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잘 담지 않는 이유가 바로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올 길 없는, 비참한 결말 예견된 공포에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4년 이상 식단 관리와 운동을 매일 같이 꾸준히 해온 몸이며,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뱃살을 정리하고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과 뿌듯함을 크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몸이다. 그런 내가 총각김치 한 통의 저주에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이 저주는 미각의 쾌락이 절정에 달해 밥 통제가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식재앙이다.


요새 총각김치 담그면 '절대로' 안된다. 요즘같이 날이 추울 때 총각김치 잘 익으면 극단적으로 행복한 맛이 난다. 이 절대 쾌락은 재미있는 비디오 게임이나 잘 만든 K-드라마가 현생 일상을 무참히 파괴하는 강도로, 삶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하며 건강 다이어트를 실천해 왔건, 체계적인 운동으로 체지방을 조절해 왔건, 다 소용없다. 펜타닐급의 마력이 일상을 한 방에 무너뜨린다. 그러니 아예 총각김치는 담그지도 말고 사지도 말아야 한다. 아삭아삭 잘 익은 총각김치를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말고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한다.     


 대문 사진 출처: Adobe Stock (by Hy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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