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는 남자 1

단편소설 '안아주는 남자'

by 하트온

무성하게 자란 토마토 나무가 여름 땡볕 아래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다. 어여쁜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오이. 벌 나비의 시선을 혼자 독차지하는 풍성한 토마토 넝쿨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얇은 팔을 뻗어 주변에 있는 건 뭐든 칭칭 감아 잡고 오르는 오이 넝쿨을 보면서 나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와 처음 만난 장소는 천정이 시원하게 뚫린 아이리쉬 펍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전 시간에 아이리쉬 펍은 한산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짙은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젊은 여자가 다가오더니 스텐 피쳐를 숙여 차디 찬 물을 따라주었다.


‘한국사람이 절대 오지 않을 곳이에요. 음식도 분위기도 한국인에겐 무척 생소한 장소거든요.’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도착했는지 여자가 테이블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검은 레깅스 위에 검은 쇼트 팬츠, 검은 운동복 상의를 날렵하게 입고, 검은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서 마치 어느 영화에서 본 첩자 같았다. 나는 재빨리 명함을 건네며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장재호입니다.”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세고 거칠게 느껴졌던 첫인상과 달리, 선글라스를 벗고 마주 앉아 말을 건네는 여자에게서 상냥하고 예의 바른 느낌이 풍겨왔다.


“네. 의뢰인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회사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나는 원래도 살가운 성격이 못 되지만 일에 있어서는 더 냉철한 태도를 고수하려고 한다. 맺고 끊는 것을 분명하게 할 수 없으면 어떤 물귀신 같은 인간이 수렁 속으로 발목을 잡아끌지 모르는 이런 사업을 해 나갈 수 없다.


여자는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 푸른 눈의 웨이트리스가 물을 가져다 주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물을 한참 들이켰다. 그리곤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 시선을 마주 보았다.


“제가 부탁드릴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사람의 온기’를 사려는 것이지요.”


‘사람의 온기’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가 내뱉은 단어들이 몽환의 나비처럼 폴폴 날아 떠돌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냥 신문 배달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니면 15분 동안 애랑 놀아주는 일로 여기시거나.”


그녀는 자신이 제안할 일이 어떤 일 같은 것인지 묘사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불법적인 일이나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면 무엇이든 도와 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비밀보장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안아주는 일은 어떤가요? 비윤리적인가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대답을 기다리는 여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반면, 나는 ‘안아 준다’의 이중적인 의미 사이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느 한쪽으로 판단해서 섣불리 대꾸하기가 난감했다. 뭐야? 날 시험하는 건가?


“말 그대로예요. 그냥 아기를 안아 주듯 다정하게 꼭 진심이 담긴 것처럼요. 불쌍한 아이를 안아준다고 생각하거나 엄마를 안아드린다고 생각하면 진심을 담은 포옹을 연기하실 수 있으실까요?”


난 스스로 눈치가 빠르다고 여기는 편이었지만, 그 순간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탁하려는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걱정하는 것 같더니, 다시 들어보니 내가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를 더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뢰, 받으시겠어요?”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많은 고객들을 겪어 본 경험으로 나는 이미 여자들이 저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게 하려고 얼마나 까탈스러울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심부름을 시킬 때는 처음부터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는 쪽이 뒤에 가서 말이 나오는 것보다 훨씬 낫다. 중요한 건, 상대와 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해 나갈 수 있는가 이다.


“해보겠습니다. 장소는 어디서?”

“그레이 파크요. 어딘지 아시죠?”

“잘 알죠.”


집에서 가까운 곳이다.


“아침 7시 괜찮아요? 보통 그 시간에 사람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눈에 띄지 않게 운동복 차림으로 나오세요. 그레이 파크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간 곳을 쭉 따라가면 파킹장이 나오고 놀이터가 보일 거예요. 놀이터 뒤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 있어요.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두 개의 길로 갈라져요. 왼쪽으로 따라가다가 첫 번째 나오는 벤치에 먼저 온 사람이 앉아 기다리는 걸로 해요.”


나는 그녀의 설명을 수첩에 그림으로 표시했다. 이런 지리적인 설명은 바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도 막상 장소에 도착하면 혼란스럽기 마련이니까.


“알겠습니다. 이 외에 미리 언급할 사항은 없으신가요?”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꼭 안아주셔야 하고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도 말해주세요…….”


여자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라도 주문하듯, 듣기 민망할 정도로 요구사항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바로 시작하실 수 있나요?”

“내일부터요?”

“힘드신가요?”

“아닙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7시에…….”

“네, 7시. 혹시 변동사항이 생기면, 문자 메시지를 남기지 말고 전화를 주세요. 음성메시지도 남기지 마세요. 제가 전화 온 기록을 보면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의뢰인이 비밀을 원하면, 기꺼이 투명인간이 되어주는 것이 해결사의 본분이다. 여자의 말대로, 신문배달 정도의 일이다. ‘사람의 온기’라는 신문을 아무도 모르게 그녀에게 전달하면 될 뿐.

이전 06화삼일 간의 파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