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환약, 비급서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 24가을
어릴 때부터 무협을 좋아했다.
처음 무협을 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비디오방에서 빌려온 절대쌍교 시리즈였다.
요즘도 철마다 김용 선생의 무협소설을 다시 읽을만큼 무협 사랑은 계속 진행 중이다.
몸치인 나에게 강호를 유랑하며 현란한 무공 실력을 뽐내는 협객들은 부러움의 존재였다.
가끔 무협지 속으로 들어가 기인들을 사부로 모시고 무공을 배우고, 환약을 통해 내공을 증진하며, 비급서를 통한 깨달음으로 나만의 무공 경지에 이르기를 꿈꿨다.
이태백도 말하지 않았던가, 천고문인협객몽(天古文人俠客夢)이라고.
헬스장이 나에게는 무협지 속 강호였다.
나는 지인을 통해 사부로 모실 분을 소개받았다.
그분은 옆동네에 있는 작은 PT샵 대표님이었다.
극 내향인인 나에게 여러 사람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운동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작은 공간에서 1:1 수업 위주로 하는 PT샵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분의 경력도 마음에 들었다.
그분은 재활병원 헬스트레이너로 일했었다.
백평 규모의 큰 헬스장도 운영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작은 PT샵으로 규모를 축소한 터였다.
첫날 선생님은 마사지베드에서 뭉친 근육을 공들여 풀어주었다.
마치 무협에서 고수가 주인공의 혈자리를 뚫어주듯이.
선생님 손이 닿는 곳마다 처음에는 아파서 몸부림치다가 점차 돌처럼 굳어졌던 근육이 말랑말랑해졌다.
좋았던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첫 운동은 벤치프레스를 하는 의자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낮은 의자인데도 다리가 잘 들리지 않고, 몸이 휘청거렸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손에 의지해 의자 위를 구부정하게 몸을 움츠린 채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런 추한 모습이 먼지하나 없는 깨끗한 거울들에 투명하게 비췄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의자 운동 다음은 맨몸으로 바닥에 손을 짚고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오는 것이었다.
어릴적 선생님들이 단체로 벌을 줄 때 자주 했던 자세였다.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를 잡자마자 메슥거림에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선생님은 당이 떨어져서 그렇다며 내 손에 초콜릿 몇 개를 쥐어주셨다.
타고난 운동신경은 없지만, 체력만큼은 막연하게 보통일 거라고, 중간은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게 두려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는 첫번째 운동 계획을 세웠다.
스쿼트를 몇 세트 하고, 런지를 몇 세트 하고 이런 운동 계획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세 번 무조건 PT 수업에 간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운동 계획이었다.
계획에 대한 보상으로 PT샵 근처에 내가 좋아할 만한 맛집, 카페, 서점, 쇼핑할 곳까지 다양하게 조사해 놓았다.
게임에서 초보존을 기획하듯 목표는 작게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보상은 만족감이 크게 느끼도록.
일에서 배운 기술을 내 삶을 기획하는데 적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운동하는 습관을 만드는 게 필요했다.
요즘은 일부러 계단을 찾아다닌다.
비라도 오면 야외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대신, 아파트 일층부터 꼭대기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오곤 한다.
물론 당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 사이 기초 체력이 많이 향상되며 스스로 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실에는 소설처럼 기인도 환약도 비급서도 없다.
매일, 정해진 운동시간에 집중하는 내가 스스로의 기인이자 환약, 비급서였다.
일주일에 4~5일은 요가원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제 요가 선생님이 계속 강조한 말이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자세를 쫓아가지 말고, 나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집중해서 느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골격의 생김새와 근육량을 가졌으니 다른 사람 모습을 흉내내는 건 내 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소통해야 하는 건 나의 몸이지, 남의 몸이 아니다.
무협지의 주인공은 기인, 환약, 비급서가 있어서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무공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구하고, 나아가 강호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