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라는 건 설레임이자 막막함이다.
설레임이라는 감정은 미래의 꿈에서 빌려 온 허상이니 현실에서는 막막함만 남는다.
글을 쓰겠다는 시작도, 글을 쓰기 위해 운동을 하겠다는 시작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출발했다.
언젠가는 무언가 보이고, 무언가 이룰 거라는 기대감으로.
하지만 무언가 보았다고 생각하면 신기루였고, 무언가 잡았다고 생각하면 쓰레기였다.
글도 운동도 기술은 늘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할지는 점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순간이 찾아왔다.
815런에 참가하자는 지인의 권유에 응한 건 순전히 날 위해서였다.
10km보다 적은 8.15km라는 완주 거리, 1시간 30분이라는 넉넉한 시간제한,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의 기념품, 경쟁하지 않는 비기록 대회라는 것이 처음 런닝 대회에 참가하는 나에게는 좋았다.
국가 유공자에게 기부한다는 좋은 취지도 곁들여지며 참가할 명분마저 훌륭했다.
그래서인지 815런은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끼리 만든 취미 동호회 같이 달리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분위기였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붙잡은 건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는 아기들이었다.
역대급 무더위로 지글거리는 땅 위를 8.15km나 달릴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8km는 빠르게 걷고, 마지막 피니쉬 150m 정도만 전력 질주해 볼까 하는 엉성한 계획을 가지고 참가했기에 달리기 경험이 많은 지인은 앞서 보낸 터였다.
나는 천천히 아기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후미에서 걸었다.
예상 못한 일은 중간 정도 지점에서 일어났다.
해 진 후에 치뤄진 밤대회인데 중간에 불빛이 없는 구간이 나타난 것이다.
월드컵 공원은 근처에 주거지는 없고, 동서남북으로 이동하는 도로만 어지럽게 얽혀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가로등이 없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둠속에서 당황과 짜증이 몰려와 주최측의 운영 부실에 대한 불만으로 뭉쳐졌다.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내 발밑을 희미하게 비췄다.
참가자 분들 중 일부가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으면서 핸드폰 후레쉬를 킨 것이었다.
그 불빛이 머무른 곳에는 한 아이가 아빠 무등을 타고 신나서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빛을 더했다.
어차피 내 발밑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했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주변 분들 발밑의 어둠도 두루 사라지길 원하는 마음이 함께 생겼다.
내 소설에 결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 조금씩 보였다.
마음이 편해진 그날부터 글쓰기도 운동도 한결 가벼워졌다.
터널의 끝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때 기적의 도서관 서평 수업... 맞죠?
분위기가 달라져서 긴가민가 했어."
도서관에서 문화탐방으로 강원도 인제 기적의 도서관 단체 관람 행사가 있었다.
그곳에서 이전 도서관 수업에 같이 참가했던 고마운 분들과 다시 만났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그분들이 수업에 마음을 열고 참가한 덕분에 나는 소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와 소설을 읽고 감상을 쓰고 말하는 자리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보다 한결 밝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달라졌나요?
아마도 번뇌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나 봅니다.
그때도 오늘도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