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내가, 그때의 우리들이.
퇴근길, 비가 그치는 듯 싶었지만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봤었고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본능 덕분에 왼쪽 손등 위에 어느새 '우산'이라고 써 놨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머리가 이렇다.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나의 준비물을 잃어버리기가 이제는 일상다반사다. 메모를 더욱 철저히 함에도 이렇게 놓치고 만다.
얕은 비 정도쯤이야... 라는, 제법 익숙한 깡이 붙어 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건물 안에서 바깥 공간으로 나가는 순간. 그렇게 내리는 빗길 앞에 당도했을 때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는 것도 잠시. 이 또한 본능적으로 갑자기 몸이 멈춰 섰다. 보통은 우산을 쓰고 가거나 아니면 비를 맞기를 거부하려는 몸부림인 것 마냥 뛰는 것이 정석(?) 일지 모를 테지만 이상하게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대로 정지 모드...
내리는 비를 맞으며 평소처럼 걷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은 더 느리게 걸었다. 악취미가 발동했던 걸까. 그렇게 비를 맞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혼자 자체 드라마 찍을 작정의 우스운 의도는 사실 아니었지만 뭐랄까. 비를 맞고 싶었다. 아마 문득, 정말이지 갑자기 그 날이 생각 났었기 때문에... 그이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이 '내리는 비'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사소로운 연애의 감정을 주고받던 어떤 날이 바닥 속 기억을 박차고 올라와 나를 두드렸었기에. 아마 그 날이 없었다면 우리는 연결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테니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의 기준이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는 것' 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치자면 (사실 그게 당연하다) 나는 그에 반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고 우산을 가지고 있지만 쓰고 싶지 않다면 그럴 수 있는 것' 이 '평범'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에 가까웠다. (봐줄 만한 또라이로 치자...)
거침없고 거칠었고 어떤 면에서는 참 제멋대로인 사람.
남들에게 평범이 나에겐 평범하지 않았고, 상식이나 기준 따위가 때로는 불합리와 모순으로 보여서 거부하곤 했던 여자가 전혀 반대의 남자와 만났다. 둘이서 연애라는 것을 주고받고 근교로 나들이를 나갔던 날, 공교롭게 가는 도중에 비가 내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고 우산은 없었다.
- 잠깐만요.
차 밖으로 나가서 내리는 비를 맞기 시작했다.
사실 일부러 그랬던 것 같다. 그래. 일부러 그랬다. 이 사람이 나를 따라 나올 사람일까 아닐까 실험해 보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자신의 기존 관습(?) 을 파괴할 줄 아는 사람인지, 누군가를 위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진짜 '사랑' 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바보 같은 나의 마녀 기질적인 악취미.. 그렇지만 처음부터 알 수 있었으니까...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나이 때에 딱 평범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 그것도 전혀 다른 기질과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새 내 옆에 같이 서 있었을 때.
아마 그 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도 없었지 싶다. 내리는 비를 같이 맞고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러지 못할 거라는 나의 편견 서린 짐작이 깔끔하게 무너지는 순간. 그때부터 비로소 마음을 열었던 나였으니까.
- 보통 비 안 맞는데..
- 친구가 맞고 있잖아요.
- 비 맞는 거 안 좋아하실 거 같은데 왜 나오셨어요
- 그냥..
- 네..
많지 않은 연애의 시간, 짧은 기간을 거쳐 결혼을 한 나는.
예전에 그 거침없고 자유롭고 주저 없이 뭔가에 '반할 줄' 아는 기질을 조금씩 천천히 잃고 살기 시작했다. 사실 '잃다'라는 약간의 부정 미가 느껴지는 동사 대신에 '변하다'는 동사를 쓰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한다...주저했다는 건, '잃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다는 의미일테다...
예전의 내리는 비도 맞을 줄 아는 게 자연스러웠던 나는, 사실 그때의 나를 많이 잃어버린 채 산다.
그래야 살아지니까. 때론 상황과 환경에 맞춰 변할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이라면, 그래. 나는 이제야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걸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맞바꾸면서까지 보듬고 키우고 인내하고 절제해내는 시간이 겹겹이 쌓일수록... 반대로 그에 맞춰 '변하고' 대신에 어떤 그리운 것들을 '잃어' 버린 척.. 사실 잃지 않고 내면에 은밀히 감춰 두며 살고 있을 뿐일지 모르는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아주 가끔은, 그렇게 내리는 비를 맞고 싶은 여자로 돌아간다.
내일이 없다면 어떤 걸 하면서 살까를 고민하며 사는 요즘이라서 그럴지 모르겠다만, 그냥.. 우산은 없었고 비는 내렸으니까. 이왕 그러하다면 내리는 비를 애써 도망치려는 듯 뛰면서 피하기보다는, 느긋하게 걸으며 그 비 내리는 순간 조차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 모른다.
남겨진 시간에 제일 하고 싶은 걸 누가 묻는다면 여전히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기에.
해외 출장을 떠난 그에게 보이스톡으로 차마 그 이야기를 하진 못했다. 아직 철들지 않았다고 웃고 넘길 그라는 걸 알면서도. 다만 짧은 메시지로 그에게 일상의 안부를 건넸다. '잘 다녀와. 보고 싶네.' 라고. 물론 보고 싶네 다음에 생략된 문장은 방백 처리되어 나의 입가에만 맴돌 뿐이다.
보고 싶네.. (그때의 내가, 그때의 우리들이)
#어제_퇴근길_비 맞고_귀가한 날_궁상각_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