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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02. 2020

제 인생은 스스로 만들 거예요

퇴사 후 2일 차, 첫 주말

제 인생은 스스로 만들 거예요


- 작은 아씨들 -





벽돌 책 한 권을 느리게 독파 중이다.

까마득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작은아씨들'의  '걸 클래식' 시리즈가 소개된 출판사의 DM를 보고 바로 독서 리스트에 적어 두었었다. 양장본의 아주 두꺼운 책은 퇴직원을 제출하기 하루 전 날, '퇴사 선물'로 간택되어 집으로 고이고이 모셔왔다. 나름의 '퇴사 의식'이었다. 12년 3개월을 꽉 채운 첫사랑 같았던 첫 회사의 이별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되도록 부작용 없이, 잘 이별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었다고, 이렇듯 어설픈 변명을 스스로 해 본다.



퇴사 후 주말, 3월의 시작

어김없는 주말의 풀데이 육아가 성황리에(?) 지지고 볶는 시간을 겪는 와중에도, 이제는 뭐랄까 마치 훈련이 된 기분이다. 배우자의 급 회사 호출로 주말 조차 혼자 아들 쌍둥이를 보면서도 그런 나를 두고 놀이터에서 만난 15개월 차 외동딸을 둔 엄마 두 분과 잠시 말을 나누었다.



- 쌍둥이예요?

- 네. 이란성이에요. 아들...

- 와.. 대단하시다. 옆에서 보니 되게 차분하게 키우시는 거 같아서

- 아녜요. 성격 많이 버렸어요. 여전히 잘 울기도 하고... 지금 그때... 힘드실 때죠. 돌 지났나요?

- 네.. 아직 한참이죠

- 그래도 그때가 가장 예쁘기도 한대 저는 너무 힘들어서 예쁜 거 모르고 키웠어요.

- 힘드셔서 마르셨구나... 저는 끼니때 없이 먹을 수 있을 때 막 먹는 편이라...

-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데요 뭐. 저는 못 먹고 안 먹히는 케이스라.. 차라리 먹힐 때 드시는 게 나아요

- 네... 그냥 빨리 일하고 싶어요. 애기 맡기고.  

- 아... 휴직하셨어요?

- 네. 어린이집에서 연락 안 왔으면 정말 못 갈 뻔했어요.

- 네.. 일 하셔야죠. 일 하시면 더 한결 좋아지실 거예요. 숨통 틔이실거예요.




그녀도 나도 '일'을 원했던 여성'동지' 였다는 걸

한 명은 '일'을 예정에 두고 또 한 명은 '일'을 그만둔 상태. 그럼에도 우리는 암묵적인 짧은 대화와 미소의 주고받음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육아 자체에만 목매달고 싶지 않다는, 어떤 강한 개인성의 유지와 세상 밖을 향할 의지를. 그래서 더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놀이터의 오후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돌 지나서도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봤다. 지금은.. 양반 다 된 데에 감사할 뿐...




집에 와서 씻기고 밥을 먹일 때쯤 그이가 돌아왔다.

남은 시간의 양육을 조금 덜어놓고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틈틈이 오전부터 순식간에 밀린 독서 정리와 서평을 해치우듯(?) 쓰려는 열망을 텍스트로 가감 없이 날려 버리기 일쑤였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아이들도 이제는 식탁 위에 노트북을 켜 두고 앉아있는 엄마를 보면 '엄마 일 해?'라는 말을 한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도 '일'이라고.

퇴직원을 제출하던 날, 나는 브런치의 프로필을 바꿨다. 현직 일개미에서 전직 일개미로, 그리고 붙은 또 하나의 수식은 '프리랜서 집필 노동자'. 제법 그럴싸한 단어지만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정 수입 없는 프리랜서 집필 노동자가 맞겠지 싶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전업작가'를 말하지 못했던 건,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없어서다.

전업으로 '글'을 쓸 용기가 아직 나지 않는다. 글'만' 쓰고 살진 않을 것 같아서. 글이 메인이 될 수 있으나 나는 글로 먹고살 요령을 어떻게든 만들어낼 작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전업작가'라는 타이틀은 영 부담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게 '집필 노동자' 다. 노동은 노동이니까. 시간과 에너지를 직장인의 두 배 이상은 넣어도 성과가 쉬이 나지 않는, KPI 조차 따지기 쉽지 않은 그것....'집필' 이니까.




알아주지 않아도 써야 하는 삶이 바로 그러할 테니까. 그래서 고통스러운 직업이 작가라고 누가 그랬다.




퇴사 후의 주말, 다이어리에 몇 개의 목표들을 다시 세팅해보았다.


1. 300권 읽기

- 직장 다니고 애 키우면서도 작년 261권 정도 읽었으니 직장 '안' 다니는 시간이면 최소한 300권은 읽어야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2. 책 2권 내기

- 생각해둔 원고들, 가 제안받은 의뢰들을 주저 없이 이제는 그대로 돌진, 전진...



3. 공부, 라이선스, 수료

- 직장 다니면서 미처 시간 핑계로 못했던 공부들, 다 해서 수료와 라이선스를 '수집' 하는 한 해로 만들겠노라고. 이미 리스트가 얼추 정해지니 은근히 쉬면서도 쉬는 게 아닌 시간들이 될 것만 같다. 뭐라도 공부해 두면 나중에 사업할 때 도움될지 싶다.



4. 매니징 경험 쌓기

- 독서/글쓰기 커뮤니티를 소박하게 운영 중이었으나 이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운영을 해 볼 생각이다. 이미 너무 감사하게 '리치 해빗 라이터스' 모집을 오픈하자마자 신청 해 주신 감사한 초기 멤버님들을 위해서라도. 더 읽고 쓰는 삶으로 아예 환경설정을 해 버렸으니 (빼박...:) )  이분들을 언젠가 서점에 꼭 VVIP 초대를 해 드릴 생각이다. 이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며...  



5. 긍정 훈육과 양육

-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즘의 둘째와 어떻게 잘 지내볼까를 늘 생각한다. 방법은 '긍정'과 '감사' 밖에 없더라. 긍정 훈육과 양육으로 책무를 잊지 않겠노라고..




다이어리에 호기롭게 목표들을 얼추 적고 다시 읽다 만 작은 아씨들에 눈을 돌리던 중

문득 영화의 장면들은 어떻게 재현될까 싶어서 몇 개의 검색을 하다가 눈에 꽂힌 텍스트를 발견하고 말았다. 아마도 카피 문구였겠다. "제 인생은 스스로 만들 거예요." 당당하고 용감무쌍한 발언을, 나는 눈으로 보고 곧장 입술 밖으로 조용히 내뱉어 보았다. 그러면.... 정말 그 말이 현실로 될 것 같아서.



퇴사 후 첫 주말, 사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예측 불허한 삶에서 순식간에 불어닥친 이 새로운 환경설정에 잘 적응할 자신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치지도 않는 나를 발견한다. 아니, 가끔 오히려 어디서 이런 에너지가 다시 용솟음치는지 나는 다시 새로운 '일'을 이미 찾은 듯한 느낌이다. 그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이고 '길' 인지는 가봐야 알 듯싶지만.



스스로 만들어 나가 보는 중인 이 길을 가 보겠노라고

나는 스스로 내내 주문을 걸었다. 이것은 이제 회사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며 외웠던 출근길의 주문이 아니라, 식탁 위의 노트북, 핸드폰 속 유튜브로 출근을 하려는 나의 또 다른 '출근길의 주문' 이리라.




3월이니 곧 더 따뜻해지겠지... 차가움은 조금씩 풀어지기를.





#퇴사하니 쓰고 싶은 글감은 왜 이리 떠오르는지

#다음엔 퇴사하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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