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 윤희에게 -
참을 수 없을 때 쓰고 만 글은
당시의 나를 살리곤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예전의 글을 다시 읽었을 땐, 무엇이 이토록 자신을 망쳐놨을까라는 서글픔과 대면한다. 무엇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그렇게 문장으로까지 만들어진 걸까를. 오늘도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키보드 위에 손을 갖다 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지금처럼...
인생의 모든 장면을 글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나는 생각했다. 분명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모든 장면을 글로 옮겨놓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인생의 '보이는 단면' 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들의 그 '행복' 만을 볼 테지만, 한편으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매 순간 분투하고 투쟁하는 누군가의 잔혹한 '절망'이나 '고통' 은 쉬이 보이지 않기에. 그러하니 모든 인생의 장면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그 절망이나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나는 어느새 그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둘째 둥이가 친정엄마와 함께 귀가하던 오늘, 며칠 떨어져 있었지만 반가운 기색의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보자마자 '엄마 미워'를 연발했다. 뭔가 또 틀어진 걸 테다. 괜찮았다. 익숙하니까. 그 '미워'는 진짜 '미워'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러나 정말 미운 상황이 돌연 발생하기 시작한 거다.. 그 덕에 오후 3시 30분의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설거지에 무엇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친정엄마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걱정... 그것은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사랑으로 포장된 걱정에서 급기야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들을 받아쳐내야 했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책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주부'가 되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느새 그렇게 발견되고 있었다.
- 도대체 집에서 애 키우면서 이게 뭐야
- 뭐가 묻었었네.
- 요리에 관심이 없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애들 둘씩이나 낳고 키우면 제대로 살아야지 이젠.
-... 네. 잘할 거야. 이제 집 가셔. 이틀 한 명 봐주셔서 많이 쉬었어.. 한 명은 정말 쉽더라고...
- 한 명도 제대로 못 키우잖아 너
-... 엄마... 나 할 일도 있고. 어서 가요..
- 그렇게 머릿속에 딴생각이 가득한데 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회사 다니며 애 키우는 데 둘 중에 하나가 없어지면 하나라도 잘해야지.
-... 뭐?
- 네가 회사에서 쫓겨난 걸 스스로 잘 생각해봐.
-...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야 해... 도대체 얼마나 내가. 청소.. 엄마만큼 완벽하게 못해. 일 그만둬도 자신 없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이 정도면 난 잘한다고 생각.. 해. 엄마한텐 성에 안 차겠지만. 요리. 그래요. 먹는 데 관심 없으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아이들 굶기진 않아요.
견디기 힘든 목소리가 들려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몸은 반응을 하고 마니까. 정말 아픈 말들을 귀로 담아 흘려버리려 애를 쓸 땐 귀 대신에 눈이 반응을 하고 만다. 눈물이 그대로 흐르는 건 쌍둥이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옥 같았던 산후우울증의 '탓' 일거라고.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집에서 아이들'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었기에 그 우울감이 가족들에게 전염되기 일쑤였고, 그로 인해 친정엄마와 매번 큰 다툼을 하는 건 다반수였다.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 깊게 서로의 마음을 파고 마는지. 그 아픔을 알기에 나는 과거와 같은 후회는 하지 말자며 악착같이 참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소용없다는 걸 알아채고 만다. 눈물이 흐르고 말면. 큰 소리를 내고 마는 못난 나를 발견할 때면. 시작되고 마는 어떤 울부짖음 들을 스스로 듣고 말았을 때는.
- 내가 왜 쫓겨났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뭔데? 아이들 잘 못 봐서? 일하고 쌍둥이 키우면서 책 써서? 그게 그렇게들 못마땅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야? 근데 그건 내가 다 감당하면서 해냈던 건데? 내가 좋아하는 거 딱 하나 하면서 살자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 애 잘 키워라. 나 간다.
엄마는 집으로 향했다.
둘째는 가는 할머니를 붙잡지 않았고 딸기우유를 달라고 나에게 매달렸다. 첫째는 우는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다행히 눈을 마주 차지 않았기에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뛰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진 못했다. 대신 키보드위에 손을 올리려 했을 뿐.. 그런 어리석음을 또 범할 뿐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살아야 했기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 밖에는...
퇴사를 한 이후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묘한 우울감으로 인해
여러 가지의 생기 있고 활력을 돋게 만드는 액티비티를 하려고 애를 쓰는 나를 엄마가 알았다면 더 큰소리를 내셨을까... 매일 유튜브로 출퇴근을 하면서 아침에 녹화한 10분이 채 되지 않는 것들의 영상을 편집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아이들의 매 끼니를 챙기고 청소를 하고. 못했던 집 정리를 마치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경제 기사 브리핑을 하고 기록을 남기며. 가계부와 그간의 공과금 및 밀린 자산 정리와 재무 세팅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그 와중에 다시 간식 때가 되면 간식을 챙기고. 외출의 성화를 부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찬 바람을 헤치고도 바깥에 다녀오면 어느새 이른 저녁 시간, 목욕을 시키고 조금 놀다가 먹놀잠을 마치면 다시 밤... 혼자 남겨지는 시간. 그제야 '나'를 찾으려 다시 애를 쓰는 저녁시간...
우는 모습을 들키는 건 그 시간의 나뿐이다.
아마 오늘은, 조금 더 쓰린 마음을 달래는 나를 발견하게 될 테다. 제일 싸우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만큼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세상의 비빌 구석... 쌍둥이를 낳고는 더더욱 평생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마는 슬픈 사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늘 반대의 지질함을 보여주게 되는 사람...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
오래 시간이 지나도 상흔으로 점철되는 데 아파도... 따지고 보면 그 상흔 조차 서로의 사랑의 증거일 테니까. 나는 엄마를 사랑해서.... 엄마는 나와 아이들을 사랑해서... 우리의 오후는 그 때문이라고. 그것뿐이라고. 숨을 한번 쉬고 뛰는 심장을 조금은 가라앉히고,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약속한 4시가 다 되어간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무를 다 하기 위해...
이제는 '바깥에서 일하니까'라는 변명 따위 그 어디에도 통하지 않는 현실을 슬프게 직시하며. 누군가에게 '일' 은 돈이 되는 바깥에서의 일일 테지만 나에게 '일' 은 사실 잠들기 직전까지의 모든 '책무'의 시간들임을 알기에. 아이 있는 기혼여성의 일상은 그 모든 시간이 투쟁이라는 걸, 그녀가 알아줬음 싶었지만 이젠 그 바람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