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잘 시작하셨을까요. 불을 켜면 새싹 색에 가까운 녹색 독서등과 특히 레드 와인이 담긴 잔이 눈에 들어왔어요.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계실 새벽의 민님, 왠지 모르게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한 조화라는 생각이 드는 지금이네요.
저희들에게 만약 책과 글을 제외한 확실한 교집합이 있다면 그건 역시 아들 두 명과 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라는 것이겠어요. 엄마로서 말이죠. '모성'을 포함한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계신다는 편지를 주셨을 때...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곤 두서없이 단어들이 툭툭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서 한참을 애먹었었네요. 많이 추스르고 나서 조심스레 편지를 띄우는 지금입니다.
저희 6세 아들 쌍둥이들은 사랑스럽습니다... 네. 분명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분명해요. 가임기에 제 배를 거의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르게 만든 장본인들을 저는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어요. 막연하고 불안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요. 출산 이후에 그 생각에 완벽히 - 정말이지 완전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 깨졌죠. 오만해도 그렇게 오만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야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나 할까요. 특히 사랑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정말 부끄럽지만 저는 아이들과의 사랑을 주고받음에 실패하고 말 때마다 절절히 깨닫습니다.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엄마 코끼리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달고 살아요.;
비교하면 안 되지만 언제나 비교를 하게 돼요. 친정어머니께 받은 지극해서 미안했던 사랑과 제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이기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 사랑 사이의 격렬한 간극에 대해서. 친정어머니는 모성신화의 대표주자였고 저는 그 신화를 철저히 깨버리기 일쑤인 여성이라 그랬던 걸까요. 또한 두 아이가 서로 각자 보내는 사랑의 극과 극의 형태에 대해서. 쌍둥이지만 한 자궁에 있었다는 것이 교집합일 뿐 사실은 정말 다른 주체나 다름이 없어요. 상대적으로 순한 성정의 1분 형인 첫째는 모든 면에서 저보다 나은, 사랑을 표현할 때에도 아이답지만 뭐랄까. 굉장히 세심하고 살가운 편이라고 할까요. 제가 우울해하거나 눈에 물이 고였을 때에는 언젠가부터는 말없이 다가와 볼에 입맞춤을 해 주곤 하거든요. 그래서 더 울보가 되어 버리기도 하죠. 그러나 둘째 아이의 사랑은 그야말로 자신을 이해받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갈구와 열망이, 아이의 높은 목소리와 목청의 데시벨에 다 담겨 있어요. 때로는 극악무도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생떼'로 자주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급기야 저는 못나지기 일쑤가 됩니다. 그 시기를 참지 못한 채 같이 고통을 느끼고 말거든요. 사랑이 통하지 않았을 때의 비극은 이런 것일지도요.
아이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를 제가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아이는 분명 그저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말이죠. 그걸 인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제 책임이고 역할인데도 왜 저는 번번이 그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는 걸까요. 우리 사이의 주파수 대역대가 처음부터 어긋나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열패감에 휩싸이고 그것은 곧장 죄책감으로 변하곤 하네요. 민님도 그런 시기가 있으셨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요. 시간이 역시 약이고 답이 되는 것일까요. 인내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참고 참고 또 참았을 때 그것만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미덕의 후유증은 조용히 언젠가 엉뚱한 것으로 변해서 나를 덮쳐버리는 건 아닐지... 그런 엉뚱하고도 못난 생각을 여전히 달고 삽니다.
인내의 종착지는 석양이라는 생각을 해요. 석양은 매일 반복되거든요. 그리고 또 나름의 끝과 시작이 있고요..
아이에게 제일 많이 고백하는 동사가 어느새 사랑하다에서 용서하다로 변해가는 요즘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저 또한 한껏 폭발하고 난 이후엔, 그래도 희망(?)이라 생각되는 건 제가 굉장히 차가웠다가도 결국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만다는 거예요. 용서도 사랑의 일종이라면... 저는 요즘 그 사랑의 실천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 시기를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사랑을 하려 애쓰는 '엄마' 들이 느끼는 비슷한 감정일 수도 있겠고요..
사랑에는 양가감정이 있다 하죠. 뜨겁게 받아들이되 야멸차게 파괴해버리고도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도리스 레싱의 단편인 '19호실에 가다'에 나오는 '수전' 에게 왜 19호실이 필요했을지, 사실 그 단편을 접했을 때부터 저는 절절히 제 자신을 투사해버리고 말았었어요. '아이를 기르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고 했었죠. 수전의 쌍둥이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즈음 아침 9시에 나가 오후 5시까지 19호실을 찾아 그 공간에서 자신과 대면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지. 알 것 같았거든요. 물론 수전과의 차이가 있다면 저는 눈물을 금지시키지 않았고 (그럴 수 없는 성정의 유약한 인간이고) 그녀는 그랬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부정' 이라든가 '용서' 같은 극적인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지성이 그런 단어들을 금지했다. 지성은 싸움, 삐치기, 분노, 속으로 침잠한 침묵, 비난, 눈물도 금지했다. 특히 눈물을 금지했다.
-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
수전은 자신을 감싼 장막을 걷어버리고 희미한 것 대신 선명한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거든요..
쓰다 보니 어느새 한탄조의 편지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만 밀려올 뿐입니다.. 그렇지만 민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사실 믿고 싶어서 믿고 있나 봅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언제나 균열이 보이고 흔들림도 여전히 잦습니다. '이래서는 안돼'라고 몇 번을 절규하듯 속으로 되뇌기도 하죠. 아이가 주는 사랑의 신호를 적시에 알아차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이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제가 보이니까요.
제 사랑의 대부분은 이제 아이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어요. 이게 현실이라면 네. 받아들이게 된 현실이죠. 어느새 아이들은 제게 일종의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요. 저는 가끔 그 신에게 말을 겁니다. 신은 인간에게 행복보다 불행을 준다 했었나요. 그래서 불행한 인간이 더 열심히 신에게 제물을 바치게 되듯. 신과 함께 지내면서 유일하게 자라는 무기가 있다면 그건 아마 '인내심' 일 것 같아요.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중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아보는 마음... 그렇게 인내하면서 아이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를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반대로 내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가 확실히 다가가기를. 언젠가 알아채고 난 이후의 우리들이... 더 삭막할 법한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다시는 사랑의 신호를 주고받지 못하는 '어른' 이 되어 버리는 시절이 다가올지라도. 우리가 주고받았던 어린 시절의 사랑은, 비단 어긋나기 일쑤였을 뿐 사실은 일방적이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가장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어떤 말은 간단해도 힘이 참 세죠. 그 말 중 가장 커다란 파급력을 보이는 건 역시 '사랑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편지에 그 사랑에 대한 조금 더 깊숙하고 내밀한 마음을 털어놔 볼까 합니다. 감히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는 멋진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가당찮게도 이런 생각을 동시에 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아내든 엄마든, 누군가의 '무엇' 이 되어 버렸지만, 나 자신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정녕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불온한 상상을 하고 말았던 어떤 마음이, 혹은 현재의 그이를 대하는 제 사랑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 툭 하고 튀어나오면 어쩌지 싶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했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떠올리는 지금
헤븐 드림
우리 모두는 대체로 복잡하게 나쁘고 불온할 수 있다는 문장 같아서. 좋아했어요. 그 책.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