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님의 이번 편지가 '결혼 이후의 사랑'이라는 제목이어서 한번 놀랐고, 게다가 보여주신 그림이 클림트의 '키스', 그리고 워터하우스의 '장미의 영혼'이라서 두 번 놀랐습니다. 정말 기묘한 놀라움이었어요. 저도 좋아했거든요. 워터하우스의 그림들. 에드워드 호퍼만큼. 그러면서 편지와 동시에 그림을 내내 쳐다보면서, 마음을 누르듯 천천히 키보드를 눌러봅니다. 저 또한 정말 궁금하거든요. 결혼 이후의 사랑,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게다가 민님이 말씀 주신 대로, 저 또한 일상과 비일상, 조금 더 나아가자면 집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유가 있는 삶... 간절히 바라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 이 시절은 저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시간적 한계 앞에서 이젠 담담히 무릎 꿇게 되지만 말입니다.
결혼 이후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바로 그것. 자신들의 입에는 차마 담고 싶지 않지만, 담으려 해도 절대 쉽지 않은, 그러하기에 내가 아닌 누군가는 반드시 이야기하거나 정의 내려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는 그것. 네... 결혼 이후라 함은 사실혼 관계의이들일 테고 거기에 조건도 하나 붙는다면 - 일부일처라는 시스템 - 결국 법적 관계 이외의 누군가와 심적이든 육체적이든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흔히 외도라고 표현하죠. 당사자들의 복잡하고 은밀한 속내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 각 인물들 간 촘촘히 쌓아져 버린 서사는 모조리 생략된 채. 그저 보이는 이분법적 심판을 내리며 돌을 던지기 쉽잖아요. 사랑을 그저 관능과 탐닉의 육체적 교류로서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깊은 인간적 관계로서의 탐색은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더욱. 이 시대나 옛 시대나 '결혼 이후의 사랑'을 향해 던져지는 돌은 거센 힘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장 안에서 원색적인 대중성을 띄게 된 '산업' 이 기어코 된 것처럼요. 그것은 마치 대중의 열렬한 선동적 군중심리와 비슷하기도 한...
'사회라는 집단 무리에 속한 인간일수록 개인은 혐오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해요. 최근에 읽은 '혐오 없는 삶'에서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러하기에 외도를 한 당사자 이외의 타자들이야말로 오히려 더욱 열렬한 혐오성 호응을 하게 되는 영역이 바로 '외도'이고 기혼자들의, 결혼 이후의 사랑을 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자유롭고 싶기 때문에 '잘 걸린 타인'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로렌스나 레싱이 '지성의 실패'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우리가 어떤 형태의 혐오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않은 개인이라서, 체면과 위신, 보이는 시선으로서의 자신이 이 땅의 자본주의에서는 또 중요한 인간의 얼굴이기 때문인가 싶기도 해요.
Miranda, John William Waterhouse, 1916. 템페스트의 미란다는 난파하는 배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 편지는 바로 그 '외도'에 대해서 슬그머니 떠오른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볼까 합니다. 갑자기 조금은 엉뚱하지만요. 이 날카롭고 예민한 주제는 '사랑'을 탐색하고 싶은 민님께,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도 '답' 혹은 '길'을 찾고 싶은 누군가들에게 작은 실마리 혹은 어떤 무언의 경종을 울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했어요. 부끄럽지만, 부덕하고 불온한 생각이지만 저는 결혼 이후 한때 어설프지만 열렬하고도 철저히 나라는 인간이 가진 여러 다면들을 인정하고 이해해 줄 '사랑'을 꿈꿨어요... 그래서 더 문학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역시나 뒤라스의 연인이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감히 따라갈 수가 없는;) 역시 제인 오스틴 쪽이 더 편하고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그녀들의 '자제력' 때문이었어요. 그 시대 오스틴 작품 속 여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주체적 선택과정과 감정 자제력이란! 제겐 놀라움의 극치일 뿐이었습니다...
외도와 사랑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외도가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결혼 이후의 사랑은 정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나 할까요. 사랑은 도대체 왜 아픈지, 그리고 왜 끝나는지, 왜 불안한지... 이 문장을 썼을 때 민님이시라면 단연코 에바 일루즈가 떠오르셨을 거라고 감히 믿어봅니다. 최근까지도 제가 내내 손에서 떼지 못했던 책들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펼쳐볼 것 같습니다..
저는 부부상담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결혼 이후 제 정신에 대한, 사랑에 대한 생각들에 의문을 가진 적이 있어요. 그리고 여전히 종종 그러합니다. 제 정신 상태가 이상한가 스스로 검열하고 재단하며 때때로 혐오하기도 했었죠... 제도의 기준이 옳고 우리는 그것에 충실해야 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째서 저는 내면에서 들끓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하는 것인지. 물론 좋은 말로 포장하자면 개인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개인의 철학이 만약 누군가 혹은 보편적 배우자와의 철학과 상대적으로 상당히 반하는 비주류(?)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래서 미워하기도 했어요. 한 때의 제 자신을. 사랑 앞에서 그저 꾸밈없이 솔직하려 했던 모습을.
사랑의 아픔이 개인의 심리와 정서 탓으로'만' 생각했었어요. 그와 결혼했는데 뭐랄까 육체는 함께여도 심정적으로는 외롭고 심지어 어떤 순간들은, 저를 외면해버리는 그의 존재가 고통스럽기까지 했었죠.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고 했다던 그 심리상담사분의 조언... 만약 제가 받았다면 저는 그분께 반문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사랑을 기억해도 어느새 처음처럼 앉을 수 없는 몸과 마음이 되어버리는 처지에 이른다면 어떤 다른 처방이 있긴 한 건지를. 결국 처음 사랑을 기억한다는 건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내라는 것일 텐데 반면에 '경험이란 언제나 제도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 (사랑은 왜 아픈가, p. 33)라는 데에 열렬히 찬성하고 말았던 저는 '제도'를 언제나 생각하며 조용한 분노를 머금게 됩니다. 사랑이 왜 아프고 또 끝나는 것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한 개인의 탓만으로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에바 일루즈를 통해서 완벽히, 적확하게 구원받듯... 이해받았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 사회학자께서 모두 말해주시는 것 같았거든요. 사랑과 섹스, 사회학적으로 해체된 결혼 이후의 사랑에 대해서까지도.
의무를 중시하는 결혼 모델에서 당사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감정은 무시될 따름이다. 어쨌거나 감정은 결혼에 따른 결합이라는 유일한 정당성마저 외면한다. 오히려 감정은 익숙한 역할, 그리고 평생 동안 이 역할을 일관되게 감당하는 능력으로 대체될 뿐이다. 특히 이런 결혼의 가치와 품격은 부부가 각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느냐,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남김없이 체험하며 살 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좋은 결혼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연기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 능력이란 역할에 알맞은 감정을 느끼고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연기 연출을 이끄는 일반의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테두리는 서로 약속을 지키라는 의무감의 명령이다. 그러니까 저마다 맡은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연기를 하고 그 역할에 알맞은 감정을 느끼라고 하는 사회 일반의 명령이다.
-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p. 79, 사랑의 일대 전환, 결혼시장의 형성 -
Pandora, 1896 판도라는 상자를 열지 말라는 의무를 깨고 말아요. 그녀의 혁명엔 아픔이 따르겠죠.
클림트가 말했다죠. '사랑이 쓰라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고통이다'라고. 그렇지만 결혼 이후의 사랑은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넘어서 '죄'가 되기도 쉽죠.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은 들키는 것이 더 큰 죄가 되는 사랑의 모순적인 형태이지요. 기혼자들의 세계에서는 흔히 안주거리 삼듯 테이블 위에서 회자되는 흔한 농담이 있다죠. '배우자의 핸드폰을 열지 말라, 판도라의 상자를 보게 될 테니까'라고요.
민님이 보여주신 편지 속의 그림, 워터하우스의 '장미의 영혼'을 보고 저는 이상하게도 크게 기뻤고 그만큼 슬펐어요. 사실 제가 좋아하는 워터하우스 그림은 판도라와, 황금상자를 여는 프시케인데요. 호기심이 많았던 판도라는 결국 신의 선물인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는 말을 기꺼이 거역하면서까지도 열어보고 말죠. 희망만을 남겨둔 채. 그녀의 혁명은 곧장 절망과 아픔이 따랐을 테고요. 프시케 또한 그의 그림 속에서는 큐피드의 정원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요. 아마 그녀는 그 큐피드의 정원에 들어가서 거역하지 못하는, 반대로 신을 뛰어넘을 수 없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이 담긴 황금상자를 기어코 열어본 게 아닐까 싶었어요. 영원한 잠에 빠질, 죽음을 뜻하는 양귀비꽃이 발 밑 언저리에 피어 있는 것도 모른 채로. 그러나 그들 모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판도라도 프시케도 신이 아닌 '인간'... 게다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싶기도 했어요. 엉뚱한 연결고리지만요.
당신이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도 분명한가?
왜 사람들은 에로틱한 성적 사랑만이 예외라고 단정하는가? 생각할 겨를 조차 없이...
is it so very obvious that you can't love more than one person?
why is erotic love the one exception that everybody instantly acknowledges without even thinking about it?
- 지적 유희의 대마왕, 리처드 도킨스의 말이라 합니다. 번역은 서툴러서 필사해둔 원문을 남겨봅니다 -
Psyche Opening the Golden Box, 1903.
저는... 기혼 제도에 최소한 일정기간 이상이 지난 이후 적정 수준의 관계 유지 갱신권 혹은 appendix 등을 추가로 붙임으로 인해 서로 간 단체생활을 더욱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주체이자 객체로서의 개인도 존중해줄 수 있는 법적 서류적 장치(?)가 좀 더 꼼꼼해야 한다는 되바라지고도 건방진 생각을 하고 말아요. 혼인신고서 달랑 한 장은 너무 우습지 않나요... 아무튼 그런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한 사람'만' 에게 영원을 맹세한다는 것이 - 무엇을 맹세하든 그것이 무엇이든 -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그 인간 개인이 부덕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인 셈이죠.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난 이후 제게 남겨진 생각인데, 막상 다시 떠올리니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한편으로는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생을 살며 형편없기도 쉬운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하..)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편지가 너무 길어지네요. 죄송해요. 지루하시죠. '결혼 이후의 사랑'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하려던 것이 책에 밀려 버렸어요. (역시 책을 더 사랑한다는; 훈훈한 결말을 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외도라는 것이 일상과 환상의 영역 중간에 자리한,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꿈꾸는 위험한 낭만이라고 감히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이 보다 사랑의 건강한 스펙트럼 안에서 유효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은 꼭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철저히 개인적인 기준일 테지만요...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도 이해받는 것도 불가한 것, 바로 '개인' 말이죠.
결혼 이후의 사랑을 - 그것이 설령 외도라는 주홍글씨로 새겨진다 한들 - 그 형태를 마냥 특수하다고 -게다가 안 좋은 쪽으로 - 결정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의 오만한 착각이자 편견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이 가진 사회적 역할적 책무와 위치는 물론 중요하죠. 절대 무시할 수 없어요. 무시해서도 안 되고요. 괜찮은 어른이 되어 갈수록 '본분'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테니까요. 그리하여 최소한 '외도'를 하려는 이들의 건전한 마음가짐과 자세라 함은 그 책임을 절대 그 무엇에서든 소홀하면 안 돼요. 피해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절대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기에 일시적으로 현실이 궁핍하고 가난한 마음을 해소하려고 도피적 쾌락적 탐닉적으로 몸'만' 탐하는 섹스 파트너로서 이용만 하는 외도는 십중팔구 '안전' 할 수 없다는 것.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그런 한심한 마음가짐의 사람들이야말로 참여하기 힘든, 도리어 '외도' 하면 안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해보곤 했네요...
Francois Gerard, Cupid and Psyche. 1798. 프시케는 빠져나오기 힘들 거예요.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면 통제가 어렵죠.
결혼 이후의 사랑이란 그리하여...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향해서 다가오는 어떤 빛 혹은 그림자 같습니다. 결혼 이후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리기 쉬운, 한 사람을 향한 진심과 인정, 상대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도 어느 정도 아끼고 존중하며 살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들만이 다시 할 수 있는 것. 외도라는 사랑의 쾌감적 희열은 바로 거기에서 의외로 나오고 그런 면에서 미혼의 자유연애와 다를 바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에 어떤 시간순서를 기준으로 - 결혼의 전과 후, 고작 그 하루로 인해 - 제약이 가해지는 것이 저는 이상하리만치 가혹하다는 생각이 어쩐지 들고 말아요. 불멸하는 신이 아닌 유한한 삶을 힘겹게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더더욱 말입니다.
외도는 사실 흔한 것 같지만 의외로 흔하지 않다고도 생각되는 건, 외도의 영역이 한낱 가볍디 그지없는 형편없는 '바람' 이 아니라 그 시간이 '사랑'이 될 수는 없는지를 생각하고 마는 저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결혼 이후에 찾아오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 말이죠.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고 하더라고요. '앤드 오브 타임'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저는 감히도 겁 없이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섹스든 심장이든, 그 열정적 강렬한 감정을 나눈 이들이 이미 생겨버린 감정에 대해서 '제어'가 서로 적절히 가능한 수준에서 되도록 건강하게 마음을 교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말이죠...
그리고 조금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성적 사실도 간과해선 안돼요. 언제든 상대의 상대가 다시 대체될 수 있다는, 나라는 인간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이기적 유전자인 인간이 가지기 쉬운 확증편향적 우월의식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은 겸손함(?)을 언제나 가져야 하며 그런 이들이 서로 마음의 빗장, 비밀통로 같은 앨리스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면 말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현저히 낮은 무엇이, 사실은 일어날 가능성이 무한대일지도 모른다는 기적 같은 말이 진실이라면, 저는 그 0.01% 의 떨림과 울림, 누군가의 심장에 파고드는 어떤 파동이, 허망한 생을 살다 가는 인간인 우리들에게 조금은 허락되었으면 합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선택을 하든 하지 않을 자유든. 모든 행동의 결과적 책임을 담담히 감내할 수만 있다면.
살아있는 모든 것에 영원함은 없다 하니, 흐르는 강물 위의 윤슬은 눈 안에 들어왔을 때 봐야 해요. 마지막일지도 모를 테니까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의지대로 살기 힘들다죠. 다시 말하자면 잃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숨기는 것도 많아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소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자면 특히나 잃을 게 많은 이들은 안타깝게도 탁월한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특히 가장 소중한 가족이라는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의, 결혼 이후의 사랑은... 일상이 혼탁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흐르는 마음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스스로 인내와 한계 안에서... 감당할 수 있고 유지할 용기가 있는 강한 영혼의 용자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민님은 용자가 되실 수 있나요? 되기를 원하신 적이 있나요?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용기의 강함과 약함에 대해서. 취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잘 우는 인간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까지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는, 제어할 수 있는 선(線)의 사랑. 자신 있다면 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피해자가 없는 수혜자만 남겨진 세계에서라면. 그렇지만 한편 모순적 의문은 언제나 꽃 피워져요.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몸에 지닌 인간의 뜨거운 심장이라면, 상대에게 기어코 빼앗겨버리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