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적 부부의 사랑

by 헤븐

민님 덕분에 파리 14구에 자리한 몽파르나스에 대해 잠시 찾아보았어요. 모파상이나 보들레르 등 여러 유명인이 안장되어 있다지만 역시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의 무덤이라죠. 묘역에서 유일하게 연분홍빛 대리석을 사용했다는 그들의 사후를 바라보자니, 낭만적이면서도 묘하게 슬퍼 보였던 건 왜였을까요. 부부가 되었으나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오픈된 두 사람의 초연함은 정말 진실된 것이었을까요. 나의 연인이 어느 날 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할지언정 그들은 헤어지지 않기로 했다죠. 일상에서 침투하고 마는 질투와 우울, 혹은 넘실거리는 광기적 감정을 각자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글과 천착할 수 있는 학문, 두 사람 간 정신적 지지와 유대가 그럼에도 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을까요.



오랜 시간 뿌리 박힌 '결혼'이나 '부부' 혹은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두 사람은 신선하게 파괴시켰어요.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은 말씀대로 '새로운 결혼의 실험'이었겠으며 사실은 실험이 아니라 서슬 푸른 '시험'에 가까웠을지도 몰라요. 그야말로 '모순적 부부의 탄생'이었으니 말이죠. 학문적 탐구와 정서적 유대관계로 강하게 연결된 동지로 깊은 지지를 주고받았을 이 철학자 커플은 게다가 배타적 독점 관계에서 벗어나 다자간 자유연애를 서로에게 허락한 실험적 남녀로 살기를 선언했다죠. 사회와 규범, 전통적 기준과 타자의 시선보다는 개별적 인간의 내적 자유와 실존에 대해 깊이 사유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었을까요. 서로 살면서 맞닥뜨릴 수 있을 우연한 사랑에 대한 권리를 서로 거짓 없이 공유하며 그 관계를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있어야, 얼마나 흔들리는 자극을 견뎌야 가능한 것일까요. 두 사람을 내내 생각하다 보니 저는 어느새 '제2의 성'을 다시 펼치고 말았습니다. 기혼 이후에 다시 읽는 그 책이 어찌나 면밀하고도 깊숙이 다가오고 말던지요...



결혼은 때론 밀어붙이든가 영영 미루든가 둘 중 하나 같기도 해요. 보부아르라는 대단히 박식하고 또렷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을 사르트르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테니 전자였을지도 모르고요. 그렇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쉬울 뿐이죠. 사랑한다는 말 그다음의 것. 로맨스 그다음의 무엇이 필요한 셈이죠. '일단락' 짓기를 원한다면. 본연적 욕망을 거역하기 힘든 이중적이고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일 수 있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과 자유를 위해, 스스로 검열하고 마는 사회적 거짓과 내면의 진실 사이에서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바로 계획이 필요하진 않았을까요. 어른의 사랑에는 언어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듯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을 선언해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었을지도요. 그렇게 해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무언들 못할까요...



Francis Bernard Dicksee  프랭크 딕시 로미오와 줄리엣.JPG Francis Bernard Dicksee, Romeo and Juliet. 1884



그에게는 로맨스와 계획이 모두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말아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눈부신 태양 같은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서 만약 사르트르가 대단히 신여성이었던 보부아르에게 그 시대가 답습한 '여자' 로서의 '결혼'을, 출산과 양육, 가사활동을 통해 고립되어 버리기 쉬운 그 위치를 그대로 밀어붙이는 그저 그런 남자였다면 결국 그녀를 놓치기 십상이었겠죠. 게다가 사르트르는 남자로서의 자신을 꽤 잘 간파한 인간이었던 듯싶기도 해요. 구속받을수록 더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기 쉬운 인간의 이기성과 에로티시즘적 갈망을 매번 새로운 관계로부터 충족시키려 하기 쉬운 XY 염색체라는 점에 있어서도. 그러니 이 실존주의 철학자는 기혼자의 배타적 독점관계라는 시스템을 부숴버리는 대신, 누군가의 배우자이지만 누군가의 애인일 수도 있는 '자신'에 대해 서로 오픈되어 살자는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선언을 해 버리고 말죠. 깊은 신뢰와 아량 없이는 자칫 붕괴되기 쉬운, 인간관계를 향한 실로 날카롭고도 도전적인 모험...



보부아르의 소설을 도서관 서가에서 찾다가 '레 망다랭'을 발견했어요. 첫 페이지에는 '넬슨 올그렌에게' 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배우자인 사르트르가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말이죠. 호기심에 찾아보니 그녀가 미국 여행 중 만난 작가인데 그와 대단히 열정적이고 탐미적인 사랑에 빠졌다죠. 그러나 '기혼녀' 였던 보부아르는 '배우자' 였던 사르트르와의 작업 일정에 맞춰 귀국해야 했고요. 누군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 수밖에 없던 '우연적 사랑' 은 계약 결혼의 형태였기에 지킬 수 있진 않았을지요. 보부아르로서는 배우자가 기혼 후에도 맺었던 여러 관계들로 인해 질투와 시샘, 우울을 도발했을지언정 한편으로는 그의 제안이 그때만큼은 고마웠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보부아르는 '글'을 쓰는 여성이었으니, 어쩌면 글을 쓰는 여자가 위험하다는 건 삶의 실존적 모순적 갈증을 기어코 글로 실토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저로서도 종종 글을 쓰다 어떤 관능적 감각이나 원초적 불편함을 느끼고 말면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질 때가 많거든요... 헌신적인 모성과 정숙하게 절제하는 아내임과 동시에 카르멘이나 키르케와 같은 요부 혹은 마녀가 충분히 될 수도 있을 인간... 보부아르도 언급했듯이. '여자는 남자의 먹이이며, 남자의 파멸의 씨앗이다. 여자는 남자에겐 없으며 남자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의 전부이며, 남자의 부정이고 남자의 존재 이유이다.'라는 것... (제2의 성, 1부. 사실과 신화 中 p. 220)




윌리엄 헨리 마겟슨 a summer evening.JPG William Henry Margetson , a summer evening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이 존속 가능했던 이유는 사실 저로서는 이렇게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다른 묘수가 없네요. 그들은 출산과 양육, 그리고 배타적 독점관계에서 철저히 벗어났으니까.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독립' 하는 '타자' 로서의 '부부' 였기에. 그랬으니 가능했을 거라는 유난히 심술궂은 생각을 하게되는 건 왜일까요. 연애할 때의 뜨거운 유희를 주고받았을 두 사람의 에로티시즘이 기혼자가 되어 자식의 존재라도 생기게 되면, 두 사람의 에로스가 종말 하지 않고 그럼에도 끝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단연코 결혼으로 묶인 한 사람만을 향해 서로 육체적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으며 그야말로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그렇게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혼반지가 '출입금지'로 보인다 한들, 욕망하려는 인간에게 반지의 유무가 무슨 소용일까 싶은 다소 도발적이게 부유하고마는 생각의 종착지는, 그리하여 보부아르나 사르트르의 관계는 전통적 결혼관보다 오히려 솔직하고 진지하며 투명해(?) 보이기도요. 다만 그 결혼의 형태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완전히 묶이지 않았다는 역설적인 점. 가족이 되면 사적 낭만에 휩쓸려선 안 되고 자신을 속일 줄도 알아야 하며 현실적 공적 선을 향한 생활이 우선이며 대부분이 되기도 쉽죠. 지켜야 하는 대상이 늘어갈수록. 한 명에서 둘, 둘에서 넷으로...



유자녀 기혼자와 무자녀 기혼자의 생활이 같을 수 있을까요. 특히 전자에게는 두 사람의 생활패턴과 삶의 무대, 선택의 우선순위가 그야말로 극적으로 달라지는 선이 생기고 마는, 희극이자 비극일 수도 있는 이벤트가 다름 아닌 출산과 양육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하여 인간의 실존적 자유와 개별적 욕망과 쾌락과 감각과 에로스적 갈망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수축 포장시켜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넣어야 비로소 유지되는 것. 때로는 자기기만을 해야 살아지는 삶. 그게 바로 수 세기에 걸쳐 지금까지도 우리가 대단히 잘 지켜내고 있는 기혼제이자 그것으로 인해 탄생되는 집단 공동체가 지닌 가면이 아닐까 싶은 살벌한 생각마저도 하게 되고 마네요.. 그러하니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부부' 로서의 형태는 누군가들에게는 욕망 조차 될 수 없는 환상적 형태일 수 있는 셈이죠. 욕망은 현실에 '있는' 것을 갈구하지만 환상이란 무릇 현실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죠. 그렇다면 대다수의 누군가들에게는 그저 판타지에 그쳐야 해요. 그런데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그 판타지를 이룬 셈이니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그들을 찾는 참배객이 그렇게 많은 까닭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해요. 전통적 결혼이라는 게이트 앞에 신선하게 나타나버린 난세의 영웅이랄까요. (씁쓸한 자조적 농담이 절로 나오고 마네요 :) )



부부는 자기들을 공동체, 닫힌 밀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으로서의 각자는 사회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 속에서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꽃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시 사회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개인과 더불어 아량을 가지고 유대를 만들어 갈 수가 있다. 그 유대는 상호 간의 자유의 인식 위에 이루어진다. - 제2의 성 上, p. 187 -


남자가 결혼할 때 그는 자연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싱싱한 젊은 여자를 탐낸 까닭에 남자는 일생 동안 뚱뚱한 중년 부인과 메마른 노파를 먹여 살려야 한다. 자기의 생활을 미화할 우아한 보석이 지겹고 무거운 짐으로 되어 버린다. 여자가 젊었을 때에도 결혼에는 기만이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결혼은 에로티시즘을 사회화하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말살하고 말기 때문이다. (중략)


결혼이 존재하는 한 간통은 사라질 수 없다. 결혼의 목적은, 말하자면 남자를 자기 아내에 대하여 면역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다른 여자들을 보면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매력을 느낀다. 남자는 당연히 이런 여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여자들도 공범자가 된다.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일체의 무기를 박탈하려는 질서에 반항하기 때문이다. - 제2의 성 下, p. 284-285 -




프랭크 딕시 고백.JPG Frank Dicksee, The Confession, 1896



'그'가 욕망했던 예전의 '나'를 고스란히 되찾지 못하며 되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묘하게 분해요. 그러나 인생에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존재하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법이죠. 결혼 이후 새로운 두 생명을 얻은 부부는 예전의 각자가 지녔던 사적인 무언가를 조용히 무너뜨리죠. 그럼에도 판도라의 상자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어떤 감정을, 사랑을, 욕망을, 정념을, 한 시절의 자신을, 여전히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지 못하고 마는 인간은 삶 곳곳에 침투하고 마는 우울이나 고통 혹은 외로움을 감수할 뿐일 테고요. 그러니 개인적 사랑을 단념하지 않은 채로 '부부'의 관계를 유지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삶은, 종속되는 독점적 관계에서 벗어났으니 부부가 되었어도 외도나 간통, 상간이라는 언어 조차 보기 좋게 무력화시켜버리고 말았던 그들의 인생 무대 전체가, 저로서는 다가가기 쉽지 않을뿐더러 한편 멀리서 쳐다보며 묘연의 그리움과 통쾌함마저 느끼고 마는, '먼바다'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런데 민님, 그 두 사람은 정녕 자유로웠을까요. 그들은 행복했을까요... 저는 그것에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대상에게 어떤 형태로든 속하게 되지 않던가요. 육체든 정신이든, 밀접해 있든 멀리 떨어져 있든... 그러하니 사랑을 하는 자들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비록 짧은 단 몇 시간에 불과해도 사랑하는 자들의 시간은 일상이라는 궤도에서 잠깐 벗어나 실로 '여행' 같기만 할테니까. 서로 통하고 마는 이들의 대화는 마치 활시위가 당겨진 화살 같은 쏜살같음으로,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 없어서 아쉬워하기도 하는 것... 상대의 세계로 초대받거나 나의 세계로 초대하지 못했을 때 그로 인해 완전한 절망을 품게도 만들 수 있는 것. 다름 아닌 사랑 아니던가요. 물론 그 아픔을 감수하는 이들만이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사랑을 이어가며 살아가지만 말입니다. 운명이든 숙명이든, 천륜이든, 인연이든 우연이든 여러 형태를 띄고 나타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자석 같은 대상을 마주한다면...



사랑하는 인간들은 그리하여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품게 되니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니체와 살로메,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와 나타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 그리고 남과 여의 상민과 기홍... 그들 모두 자유롭거나 편하진 못했을 것 같아요. 안정적 행복 대신 불완전한 사랑의 모순을 택했다면.




movie_image_(3).jpg 상민과 기홍의 우연은
common-26.jpg 스스로도 용서하기 힘들었을테지만


common-21.jpg 유일한 유대이자 희망, 동시에 절망이었을지도 몰라요. 조용히 투명하나 한없이 깊어서 빠지면 나오지 못하는 호수처럼.



#BGM, Laurel, Festa, and Veil... (Sentimental Scenery @2017,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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