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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11. 2021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

차곡차곡 이 말을 눌러쓰면서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 달의 편지, p. 289 -





거실에 향기를 들여놓았다. 블랙체리 디퓨저를 선택한 건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댁 내의 변화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그이도 집에 들어오자 좋은 향기가 난다며 말을 먼저 건넸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둘째 아이가 좋아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가 좋아하면, 그가 웃으면, 그가 울지 않고 떼를 쓰지도 않고 그저 마냥 순수하고 투명한 미소로 화사하게 웃으면서 목소리를 건네면, 결국 온통 웅크려져 있던 한 사람의 마음에는 그제야 제법 평화가 찾아온다. 게다가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실없이 자신 어린 생각까지 하고 만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랑하는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오만한 착각... 사랑을 향한 상상력과 의지가 만들어내는 움직임들.



정규직 워킹맘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풀타임 근무지를 '집'으로 설정한 지 어느새 1년 하고도 반이 흘러가고 있다. 메인 양육자이자 주부 생활자의 시간을 잠시 돌아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멀티플레이어력이 더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것을 하면서도 그 생각에 빠져서 헤매기 일쑤다. 

예컨대 겸직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할까. 아이를 돌보며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이 메인이지만 동시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기타 소소한 공부를 하거나 간간히 프리랜서처럼 비 규칙적인 일급 노동을 통해 자본력을 지니려는 의지는 뭐랄까 주부 생활자로서의 취업 규칙에 어긋나게 되는 것만 같은 것이다. 



예컨대 글을 써야 한다고,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시종일관 아이를 돌보면서 가사노동을 하면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은 그때부터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이다. 몸은 아이와 집과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벗어나 있으니 그야말로 근태 태만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맹렬하고도 간절하게 메인 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야심 찬 주부라니. 이번 생의 반 정도는 망했다고 느껴지는 생각의 원천은, 눈물의 원력은 거기서부터 솟아 흐른다.  



Edward Robert Hughes, Idle tears



몇 해가 지나면 곧 불혹이라던 마흔이 코 앞인데 나는 가끔 그 '불혹' 을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중간한 나이의 나를 의심하고도 만다. 잘 나이 들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에 대한 의심을. 그러니까 이 애매모호한 나이를 중년에 곧 들어서야 하는 나이라기에는 어딘지 그 '중년'이라는 단어가 지닌 그럴듯한 어른스러움과 단단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여전히 미성숙하고 유약하며 울보에다가 아직도 한참 모자란 인간이라. 그렇다고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탈퇴가 일보 직전인 꽉 찬 나이로서 아직까지야 물리적 숫자는 청년으로 셈 친다지만 그 또한 뭐랄까 청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모하게 기대하게 되는 어떤 재기 발랄함이나 사랑스러움, 혹은 뜨거운 무언가를 지니기에는 그 또한 가당찮다고 생각하고 만다. 다만 중년이든 청년이든 그런 나이별 생애주기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생각하게 되면 이제는 단 하나 밖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고 만다. 



- 그래도 날 사랑해줄 건가요. 



좋아했던 소설의 아주 오래된 이 옛 문장을 요즘 들어 다시 열심히 떠올리게 되고 마는 건 현재의 나 때문일지 모른다. 이제는 사회적 명성이나 어떤 물욕, 심지어 무언가 이루려 하는 열망이나 야망 조차 사라졌고 대신 무력함이나 어떤 환멸마저도 일상에서 종종 느끼고 마는 어른 답지 못한 나라도. 다만 딱 한 가지 이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잘 지키며 살아내고도 싶다는 열망 하나는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나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는 인간으로 살다보니 그제야 알게되는 것들이 생기곤 한다. 그들 뿐 아니라 동시에 나 자신도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둘째 아이의 세찬 입심과 공격이 조금씩 강해지는 시간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그들을 순한 마음으로 앉아줄 수 있으려면. 때로는 사랑하는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 가족이라는 존재들을 견뎌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면, 우리가 함께 지내며 그동안 일궈낸 '우리'라는 화평을 미래의 어느 시점의 '우리' 로서도 잘 지켜낼 수 있으려면... 결국 제대로 스스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나로서는 '사랑' 이 자신을 돌보는 데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현실에 없을 것만 같은 그러나 현실에 반드시 필요한 묘약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 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38 - 



Frederic Leighton , Flaming June 1895



부끄럽지만 나는 가끔 나의 사랑을 의심한다. 특히 가족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말기 때문일 테다. '견디다'는 것이 마냥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동사가 발산하는 묘하게 이질적인 두께감으로 인해 버티며 사는 것 같다는 초라한 생각이 들고 마니까. 급기야 현재의 엄마로 아내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궁색한 인간으로 내 몰기도 하기에. 그리하여 책이나 글을 더 읽고 그만큼 쓰려는 이유는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일지도 모를 테다.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사적인 욕망, 개인적인 인간, 지극히 '나'를 돌보고 지키는 시간. 가족 혹은 집이라는 섬에서 고립되어버리고 마는 일상이라도. 사적인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하게 내밀하게 갈망하는 인간은 그래서 읽고 쓰는 삶을 걸어가는 걸지 모른다.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리고 나의 사람들을. 



잘 이겨내지도 못하면서 기네스나 과실주를 향해 나도 모르게 한껏 맹렬하게 돌진하고 말다가 급기야 토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다가가 결국 바닥까지 추해져 버리는 나 일지언정. 만약 고소한 손두부와 달큼한 막걸리가 동시에 주어진다면 언제나 사실 바라고 바랐던 건 후자였다면서 건강은 손두부지 막걸리가 될 순 없을 테지만 눈앞에 펼쳐진 욕망을 향해 저돌적인 태도로 절제하지 못하고 마는 어리석은 나 이기도 할지언정. 흘러넘치는 어떤 감정들을 서두르게 추스르려다 급기야 소중한 시간을 망치기도 하는 여전히 서투른 자신이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 라고 묻고 말았다. 내가 나에게. 자주 묻게 되는 말이자 자주 듣게 되는 말.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갈망한다. 그들을 향해 가진 모든 사랑을 다 내어주려 하면서도 이제 나는 아주 약간은, 아주 조금은 내 몫을 남겨두려 한다. 그래야 그들을 지킬 수 있어서. 그래야 나의 당신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야 사랑할 에너지가 고갈되어도 다시 채울 수 있는 에너지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그 소설가의 문장은 현재의 내게 나아가야 하는 어떤 좌표점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 라면, 나 자신이 너무너무 미워지는 날이어도, 열심히 숨고만 싶어지는 날이어도. 질스튜어트의 블랙 로고 배색 소가죽 숄더백을 앉고 한껏 마음을 붙잡고 울먹이는 날이어도. 티아나 공주가 개구리로 변했다한들 결국 삶에서 더 소중하게 필요했던 무언가를 깨닫게 되고 마는 것처럼. 



이 시절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대상과 그들을 향한 사랑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그리하여 나를 미워하지 않고 이제는 조금 더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 

많은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사랑에 끝은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오필리아가 조금 더 사랑에 익숙했더라면. 끝은 없지 않았을까. 그래도 있었을까.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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