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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9. 2017

#16. 약속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고 싶어요. 곁에 있을 거라고. 함께일 거라고.  

 그녀와 결코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관계란, 서로가 원하는 완벽한 관계에 대한 환상에서 처절하게 빠져나와, 타인과 우리는 분명히 다름을 견디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갈 수 있는 곳,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레지던스 호텔로 나는 발을 건넸다. 마이클이 미국으로 왔을 때 잠깐 데려다주던 그곳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엉뚱하게도 이 곳을 알게 해 준 마이클이 고마워진다. 그녀는 나를 말없이 따라와 주었다.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키를 대고 방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간 나와는 달리, 그녀는 현관에서 조용히 아무 말하지 않은 채 고개를 떨구며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다. 그녀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 동시에 기쁨과 안타까움. 그 감정들은 모두 사실 내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번, 단 한번 나는 그녀에게 나의 모든 걸 맡겨 보기로 했다. 


들어와요 
... 왜 왔어요 여기 
갖고 싶어서. 널 보면 갖고 싶어 져 내가
.... 왜요. 
그러고 싶으니깐. 
본능적이네요. 
... 예뻐. 그래서 괴로워 
본능엔 감정이 없어요. 위험할 뿐이에요. 마음이 없는 건 싫어요.
..... (아니 틀렸어) 


 마음이 있었으니 널 가지고 싶었다는 말을, 고헤 라 네가 틀렸다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삼켜 버리고 싶어 졌다.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면서도 나는 시종일관 눈이 감아지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졸리게 만드는 한 순간에 무장 해제하게 만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미칠 듯이 다른 사람으로 만들곤 한다. 


 그녀는 얼마나 이런 나를, 남자라는 동물을 이해하고 있을까. 마냥 순수하고 여릴 것 같은 그녀도 나와 같이, 인간의 제일 끄트머리에 존재하는 본능의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할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궁금함도 잠시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여기 와 앉아봐요. 


 그녀를 침대로 끌어내렸다. 인형처럼 그녀의 여린 몸이 침대 위로 부스스 내리 앉는다. 네이비색 셔츠가 눈에 띈다. 그녀의 단추를 한 개씩 풀어헤치고 싶은 걸 애써 참아냈다. 가까이 앉은 그녀의 정수리에서 좋은 비누 향기가 난다. 아기 향기 같기만 하다. 아기 같은, 그녀의 잡티 없이 순수한 피부색과 살결을 마냥 어루만져 주고만 싶어 진다.


... 어쩌죠 이제 
..... 


 감정과 본능은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헤라를 끌어안았다. 그녀를 밀쳐 침대에 눕혔다. 그녀가 입고 있던 네이비색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천천히, 그러나 거칠게 벗겨내려 했다. 손이 잠시 주춤했지만 마음을 막진 못했다. 온 심신은 이미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으니까. 


 벗긴 옷들을 방바닥으로 던졌다. 그녀는 약간의 떨림과 저항이 있었으나 어딘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긴장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내 손길에 맞춰 바들바들 떨면서도 꼼짝도 않은 채, 내가 하는 대로 그저 체념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인형 같기만 한 그녀를 단숨에 헤치고 싶어 진다. 그러나 내 앞에 고분고분하게 앉아있는 이 살아있는 인형이 가진 아름다움과 동시에 빠져 등을 도무지 감당해 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여전히 손은 머뭇거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중독되었다.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다. 1분이 1시간 같은 이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고 어리석기만 한 처절한  생각이 드는 건 모두 너 때문이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이대로 멈춰버릴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1분이 1시간 같아. 이 시간.. 


 소름이 돋는다. 모든 게 커져만 가기 시작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서로의 마음이 겹쳐서 같은 목소리를 냈을 때. 이미 나는 그녀에게 중독되리라는 생각에 불을 지펴 버린 건 다 너 때문이라고. 이렇게 나를 변하게 만든 건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 어린 화를 내고 싶었다. 표출해 낼 수 없으니 다만 나는 그녀를 밀쳐낼 뿐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그렇게 빠져들었다.  


 와이셔츠를 다 풀어헤치자 그녀의 하얀 속살이 선명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말없이 끌어 안기 시작했으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춰내기 시작했다. 슬픔의 물결이 밀려와 마음을 적셔냈지만 그것보다는 그저 이 하얀 속살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충동만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 대로 충동과 본능과 욕망과 동시에 애석한 사랑의 후회를 이미 맛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 위에서 나는 빠른 몸놀림을 시작해냈다. 

 매끈하고 고운 그녀의 살색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헤라는 꽤 냉정한 모습이어서 사뭇 놀랐다. 몹시도 감각적인 그녀의 육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한 마리의 어리석은 짐승과도 같은 나와는 달리, 그녀는 마치 이방인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감정만 살아 숨 쉬는 아이가,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엄마의 품에 달려드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온 감각은 그녀를 탐하고 있었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도드라진 작은 입술과 혀끝에서 나오는 희미하나 선명한 숨소리와 탄식은, 내 몸을 더욱 거칠고 빠르게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으니까.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그녀의 몸속 깊은 곳은 이미 아늑한 곳으로부터 그녀의 쾌감이 불러일으킴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된 몸은 이미 서로의 영혼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던 걸까. 

그녀가 나를 옆으로 밀쳐내며 내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과 같은 표정으로, 이미 상기되어 뜨겁게 익어버린 우리 둘의 몸 위에서 반 정신이 나간 듯한 희미하고 부끄러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내 온 구석구석을 핥아내 주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듯한, 아니 오히려 정말 정신을 빠져나가게 하는 그녀의 노련한 움직임에 나는 이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소리와 나의 소리는 서로를 향한 확언처럼 들렸다. 


좋아...
응.. 
좋다.. 
이런.. 거였어요 
처음..
응.. 근데..
...?
아프지가 않아. 아프다 했는데..
... 너랑 내가 맞다는 거야 
하나도 아프지가 않아... 촉촉해
... 널 어쩌면 좋을까
.... 미안.. 아니 고마워요
내가 할 말입니다. 미안해요..


 나는 그녀와 두 번 다시는 없을 뜨겁게 달아오른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육체 위에서 둘이 하나 된다는 것은 황홀하다. 그녀도 나도 눈을 감은 채 다만 서로의 체온에만 의지한 채 그렇게 사랑을 주고받았다. 그녀 또한 싫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무한한 자유의 공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그녀의 체온과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이라는 그녀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른의 몸짓을 해 내는 그녀의 매끈함은 나를 더욱 흥분시켰기에. 


왼쪽 팔에 이거..
아... 주사자국이에요
... 예뻐요 
뭐가
그냥.. 자국이 여전히 선명하네 


 그녀가 내 몸을 소중하게 다루어 주고 바라봐 준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닿아져 오는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느껴지는 따사로운 손길은, 마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한순간이었지만, 영원할 것 같았다.
기쁨과 희열, 동시에 의미 없는 슬픔도 같이 찾아 들어왔다. 
그녀와 나의 안으로 차곡차곡 쌓아진다.



 차근차근하고 나긋한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살랑이는 미풍에 앞 머리가 내려앉은 듯한 간지러움에, 다시금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꼭 안고서 놔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내 매끈하고 날렵하게 옆으로 몸을 비껴내 내게 폭 안긴 채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뭐가
궁금했었는데.. 사람들의 체온이 섞일 때의 기분
넌 참 다른 여자완 다른 말을 하곤 해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뭐...?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요?
뭐든. 지금 이 상황에서 놀랄 게 뭐가 있겠어 
그러게 이 시간 자체도 놀라운데 더 이상 뭐가 있겠어. 그럼.....
뭔데 
나, 사람.. 아니에요 
..... 하하 


 다른 여자와는 종종 다른 단어와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그래서였을까. 홀리는 기분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만드는 건. 그녀는 확실히 달랐다. 처음부터 그녀와 말을 주고받으며 시선을 섞게 된 그때부터, 지금 그녀의 온몸까지 하나로 서로가 휘감겨지는 순간엔 더더욱. 그녀는 확실히 보통의 여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아니라고 해도 믿겠어
아.. 진짜 믿어요?
이렇게 예쁜 사람이어서, 사람 아니라고 해도 믿어질 거 같다. 
아... 안 믿는군요. 
네가 하는 모든 말들이 믿고 싶은데 안 믿길 때도 많아. 이게..
..?
이게 현실이 아닌 거 같아서 
그렇죠...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죠. 어쩌죠 이게 현실인데... 내가.. 사람이 진짜 아니면 어쩌죠 
... 헤라... 너 도대체 뭐니 
...
도대체 이 여자 뭘까 뭐길래....
..... 고양이
....?
고양이 여자 
..... 그래. 고양이 여자. 해요 그럼 
?
내 거 해요.. 곁에 있어. 고양이처럼 줄곧. 계속  
.... 있고 싶어요 
있잖아. 여기 지금 우리 같이.  


그녀가 다시 내 위로 올라온다. 시간이 무한할 것 같은 블랙홀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유키가 그랬다. 

인간들의, 사람 동물들의 본질은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그 아름답고도 추악할 수 있는, 영롱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사랑을 둘러싼 육신, 그 육체의 갈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유키가 글을 쓰고 있을 때 옆에서 책을 읽다가 종종 사람 동물들의 사랑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와 한 몸이 되었을 때, 그에게 안기고 그를 안고 있을 때 난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던 유키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될 듯도 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의 감정과 감각, 그리고 체온의 섞임, 그의 타액과 목소리가 내게 스며들고 있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운 기쁨과 동시에 고통과 두려움도 함께 밀려왔다. 유키는 알고 있었을까. 정말 육체의 갈등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이 숨어져 있는 걸까. 


 그렇다면 유키와 나와 같은 고양이 사람들은, 어떤 육체가 진짜 나의 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게 빠지면 빠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다만 이런 혼란스러운 생각도 잠시, 그는 내 생각을 곧잘 멈추게 만들었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지만, 고헤 라가 사람의 몸으로, 12시 이후에나 나와야 할 법한 고양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밤, 우리 둘이 하나가 되는 그 밤 10시와 11시 사이의 짧은 밤은, 나를 저주에 빠진 고양이에게서 정말 사람으로 바뀌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듯 내 몸을 부드럽고도 거칠게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 동물이 사람 동물의 몸에 끌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지 모르겠다. 

 과학적으로는 알면서도 모를 법한 몸의 세밀한 구석구석까지도 탐하고 싶은 욕망과 욕심.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 한다면 어쩌면 그게 인간 동물이 추구하는 아주 깊숙한 곳에 그 누구도 감히 말하지 하는 사랑의 블랙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그에게 몸을 맡기고, 내 몸도 이제는 나의 것이 되어 있지 않은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을 즈음 갑자기 유키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또 한편으론 내 눈앞에 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서 눈물이 흐를 뻔했다. 


 이런 마음을 이 사람은 알까. 얼마나 이해할까.
나의 삶을. 나의 고통을. 나의 기쁨과 이 희열과 그리움
 우울감, 공허함을 얼마나 깊은 온도로, 함께 이해해 나갈 수 있을까.. 



헤라야. 나중에 혹시라도 기억해둬 
응? 
남자라는 사람들이 여자 사람에게 끌리는 건, 그 상대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일 때도 있어.
어려워 유키야. 넌 책을 너무 많이 보고 있어. 
그래. 이해 못해도 좋아. 다만 헤라야 
응?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나중에 우리도 비록 고양이 사람이라도 말이야. 만약에 정말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된다면 
할머니는.... 그게 쉽지 않다고 했어. 그런 감정은 사람들에게만 자주 생기는 거라고 우리는 다르다고. 
그래 우리들의 것과는 다르지. 우리는 단순하니깐 근데 말이야 
응?
우리도 사람이야 
...?
반은 사람이잖아. 안 그래 
... 응 
네가 사랑에 빠졌을 때, 기억해. 그 어떤 모멸감과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 그래도 사랑이라는 거 해보고 싶어..
그래.. 그 마음 잃지 마. 난 네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지만, 반대로 네가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도 원치 않아
아.... 
그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진짜 이유일지 모르니깐. 
고마워 유키야 넌 매번...
넌 내게 그런 여자기도 하니깐
......
난 먼저 네게 다가가지 않을 거야. 널 먼저 건드리지 않아 
유키야...... 너 
다만 널 건드리게 되고, 너 또한 맡기게 되는 나 아닌 누군가가 나타나게 되면 말이지 
....
네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 그만이야. 
.... 응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야. 그것뿐이야. 명심해 
응....
네가 좋아..
응.... 고마워.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만약 이 사람이 오로지 내가 그저 보기 좋은 예쁜 나이 어린 더군다나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사람으로만 비치기 때문에 욕구의 대상이 된다면, 그건 분명 사람 동물들이 느낄 법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얼마나 추악하고 야만스러운 동물들의 세계인지를 느끼게 될 테니깐. 그러나 다행이었다. 그도 나도 수치심 이전에 서로의 몸을 섞어 내려가면서도 한없이 기쁘면서도 그리움을 동반했기에. 다행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흘러가는 1시간이 지나고 이제 12시가 되려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나를 탐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빠져 들어갈 때쯤에 문득 내 눈에 띈 시곗바늘은 어느새 11시 30분을 훌쩍 넘겨지고 있었다. 알람이 울렸다. 


아.....
시간이 방해하네. 가야 되죠...?
나... 12시 넘으면 정말 위험한데...
사라지기라도 하는 거예요? 
신데렐라..... 예요 (정말이에요) 
하하.. 귀여워 너란 여자 정말... 말 참 예쁘게 해. 그래서... 내가 널 자꾸 갖고 싶게 만들어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내 입을 입술로 막았다. 

 좋았으나 한편으론 초조했다. 정말 사라져야 하는 시간에 그가 나의 발톱과 손톱, 꼬리를 보게 되면 지금 바라보는 이 황홀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해 낼 수 있을까. 아니 절대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어서 도망쳐야 하지만, 그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 놔주지 않는 그도 문제였지만 이렇게 힘이 세게 나를 놓지 않고 구석구석 매만져 주는 그의 손길이 싫지 않은 나도 문제 중에 큰 문제였다. 


잠깐... 화장실에 가 있어줄래요 
... 응? 
잠깐이면 돼요 
아.... 응 
저기 잠깐만
...?
만약에요 
?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요 
도망이라도 치려고? 아니 오늘은 안돼. 놔주지 않을 거예요 
.... 너무 놀라지 말아요 
...?
그냥 놀라지 말아요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
우리 다시 봐요 그때 얘기해 줄게요 모두 다 
지금 얘기해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음 네 이제 무슨 일이 곧 있을지도 몰라요 
이 여자. 정말 특이해.. 도대체 정체가 뭘까 뭐길래 날 이렇게도...



그가 내 입을 다시 막으려던 찰나, 나는 재빨리 이불로 내 몸을 감쌌다. 



아무튼 약속해요 
... 알겠어요
지켜요 꼭 알겠죠. 내가 나오라 할 때 나오는 거예요. 
... 알겠어. 대신 약속해. 너도 
...?
도망가지 않겠다고. 난 오늘 도망치지 않았으니깐. 단 한번.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깐
아....
약속해. 곁에 있겠다고
..... 약속.. 하고 싶어요. 곁에 있을 거라고. 함께일 거라고.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11시 59분.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감싸던 이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반 밖에 감싸고 있지 않은 이불이 어느새 12시가 되자마자 조금씩 통증이 오가며 이미 내 온몸을 감싸주었다. 털들과 꼬리가 다시 내 몸을 감싸는 과정에서 나는 12시 이후의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그가 다시 나왔다. 


어...? 헤라 씨? 어디....


 나는 침대 밑의 구석지고 그늘진 공간 사이로 몸을 웅크리며 숨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은 빛이 났으니 눈 또한 질끈 감고서, 그렇게 그의 몸의 냄새와 폴로 향수를 뿌렸던 그의 와이셔츠 향기, 그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그의 곁을 지켜 내고 있었다. 


...... 진짜 갔나. 옷이..... 그대로인데. 가방도..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여자 도대체 뭐지....


 새벽이 다 되도록 그는 잠도 자지 않고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한동안은 핸드폰을 수시로 전화를 해 대다가 기역 고는 체념한 듯, 옷을 입고 침대 옆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잃고 싶지 않고 잊을 수도 없음을 이제 선명히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은 단 한 사람. 이 사람은 이제 그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꽃잎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듯, 이미 고양이 여자인 내 마음에 싹튼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은 쉽게 꺾을 수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꽃잎은 때론 화사하게 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바람에 휩싸여 언젠가 떨어질 낙화 시간도 함께 알고 있었다. 


허락받지 못한 몸 섞음. 그러나 서로에게 죄가 되지 않은 하나 됨이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내 몸을 더듬는 걸 허락했을 때, 이미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사람 동물이든 고양이 사람이든,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마음 깊이 거부하는 것들 조차, 결국 받아들이고 인정하다 보면 기적이 이루어지는 걸지 모른다는 믿음을.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할 수 조차 없는 심한 정신의 고요함은 그렇게 내 마음 깊숙하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와의 하나 됨이 한없이 기쁘고 좋았으며, 또한 쓸쓸했고 그리웠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리움이 넘쳐서 그 넘치는 그리움은 공허함과 우울감과 쓸쓸함으로 내게 다가왔다는 걸. 이게 사람 동물들이 느끼는 오묘한 인간의 깊숙한 감정과 감각의 향연이라는 걸, 유키의 말을 통해서 다시 재확인받을 수 있었다. 나는 정말 바보였다. 유키 말대로 바보였다. 


바보....
유키.......
사랑이라는 거 몰랐어? 모르고 시작한 거 아니잖아
....
그게 사랑이야.
아..
사랑의 두 가지 모습. 그러나 사람들은 전자만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기쁘고 행복하다는 것. 
....
사랑이 진해지고 깊어질수록 찾아오는 거야. 
찾아온다고...?
 나 자신보다 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아픈 거.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그래서..
....
그래서 진짜 사랑하면 결혼은 못한다. 
아.....


유키의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지금 흘러가고 있는 걸까.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그럼에도 유키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가 보고 싶어 진다.  


그도 그러하기를. 그래서 나를 다시 찾아와 주기를. 결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게 욕심임을 알면서도 나는 바라기 시작했다. 


그립거나 보고프거나 하는 쉬운 감정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쉽게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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