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방송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봄과 가을이 되면 괜한 기대에 들뜨게 된다. 이때 방송국들이 개편을 많이 하기에 나간 자리가 생기면 드는 자리도 생기는 법. 방송국이 많은 여의도 지역 국번 780번대로 시작하는 발신자번호가 휴대전화 액정창에 뜨기라도 하면 텐션은 정수리를 뚫고 올라간다.
지난 9년 동안 자기 목소리를 냈던 분들이 이 업계에서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분들에 비할 바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만 몇 번의 억울한 경험도 있던터라 세상이 바뀌었으니 혹시.....라는 기대를 품어봤던 것도 사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이 너무 바뀌어 있었다. 얼리어답터라 라고 자칭하는 내가 정작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세상이 바뀐 것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여의도에는 방송국들이 없다. 780번으로 뜨는 것은 금융스팸 전화다. 지상파 방송국들도 적자를 보고 영업이익이 하락하고 개편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프로그램을 뒤집는다. 방송국이 망할 수도 있다? 아니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 영향력은 어떠한가? 시사고발프로에서 누군가를 '저격'하면 그이는 유튜브와 아프리카에 채널을 개설하고 싸운다. 예전에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다. 고품질 무선망은 언제든 보고 싶은 콘텐츠를 자기 손바닥 위로 전송해준다. TV는 영상 미러링의 대상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환경 탓일까? 아니다. 그건 부수적인 것이다. 팔리지 않는 제품엔 이유가 있다. 몇 해전 출판사에 있는 친구를 만나 에세이 출판을 제안했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동세대에서 롤 모델로 인정을 받거나 굉장히 높은 인지도 또는 존경을 받고 있나요?" 결코 그렇지 않다. 머뭇거리며 빠져나왔다.
친분이 있는 베테랑 연예인 A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년 후를 생각해봐. 지금 이 캐릭터와 이미지로 5년이 흘렀을 때 어떻게 보여질지를. 그걸 생각안하면 정말 우스운 사람, 그냥 눈에 띄는 이상한 사람으로 끝날 수도 있어"
올해 초 tbs 제작진으로부터 신규 프로그램 MC제안을 받았다. 전화를 한 번 못 받았고 문자로 제안요청을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읽자마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보냈더라. 꽤 오랫동안 했던 해설일을 내려놓은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어서 굉장히 간절했던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그때 그 심정을 잊지 않고자 그 문자를 아직도 지우지 않고 있다. 녹화 전날 정도에 대본을 받으면 한 페이지에 4장씩 인쇄해서-이렇게 하면 앞뒤 페이지의 흐름을 알기 쉽다-밑줄 치면서 읽고 외우고 첨부된 5~10분 정도되는 시민영상들은 장면과 대사가 생각날 정도로 돌려본다. 계약이 성립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
1999년, MBC 라디오 '김흥국, 정선희 특급작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연해서 한 주간의 인터넷 키워드를 정리해서 설명하는 게스트로 일년 동안 일을 했었다. 주 1회 10분 출연이지만 가게점원이 택시기사가 술집 옆 테이블 손님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채더라. 이제 그런 시절은 아니고 나도 그런 상황은 아니다.
정찬성 선수가 자신보다 랭킹이 훨씬 선수를 상대로 멋진 KO승을 거뒀다. 경기 두 달전쯤 라디오 프로에서 만났는데 그러더라.
"제가 모두 진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죠."
어쩌면 감히 저 위대한 UFC 파이터와 같은 입장이다. 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며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인생의 자율성, 누군가는 평생을 꿈꾸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별 일 있게 산다. 앞으로 별 일 있게 살 것이다.
애플워치에서 왜 운동안하냐고 계속 채근거리고 있다. 이만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