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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01. 2020

독후감
경애의 마음

김금희 장편소설

코로나 19로 도서관은 모두 폐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북 드라이브 스루'라는 것으로 책을 빌려준다. 미리 집에서 홈페이지로 신청하고 도서관에 차로 가서 받아오는 식이다. 김금희의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을 신청했다. 


그의 차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 다섯 사람이 탈 수 있지만 뒷좌석에 짐이 차 있고 조수석은 조수석대로 당장 필요한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쌓여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차는 오직 그, 공상수 한 사람을 위한 차였다. 


소설의 첫 시작 문구는 언제나 설렌다. 하, 그런데 요거 참 재밌다. 무언가 지저분할 때의 나의 차를 보는 것 같은 공감 가는 일상으로 시작한다. '반도 미싱'에 다니는 상수는 팀장이지만 팀원이 하나도 없다. 회장이 아버지 친구라 백으로 들어왔다고 소문이 나 있어 실적은 없어도 회사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경애는 그 습기 차고 어두운 곳에 들어가 물품들을 나누어주거나 아니면 물품을 신청해놓고 오지 않는 직원들을 기다리며 창고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거의 모든 일에 지각하는 상수가 헐레벌떡 창고에 오면 경애는 부스스한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올린 채 담배를 피우다가 "있잖아요" 하고 불렀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간이창고의 습기만큼이나 눅눅해서 어디의 누구라도 충분히 우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껑충한 키로 창고 옆에서 항상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경애가 상수네 팀원으로 들어온다. 팀장인데 그래도 팀원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떼쓰는 상수에게 3년 전 파업에 적극 참여해 회사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는 8년 차 총무부 직원 경애를 상수에게 보낸 것이다. 경애는 회사 사람들의 따돌림과 적대가 심하지만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 엄마가 있어 생계를 위해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경애는 일영에게서 조 선생이 심한 알코올 중독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미리 상수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손까지 떤다는 기술자를 누가 쓰려고 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경애는 조 선생 마음이 상해서, 자신을 몰아낸 회사에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 걱정했지만 현실은 좀 더 비정했다. 


3년 전 파업하다 잘린 조선생이다. 상수네 팀을 베트남 지사에 보내버리려는 회사에 기술자를 요구해 조 선생을 함께 데리고 간다. 루저들의 집합이랄까? 실적 없는 상수, 따돌림당하는 경애, 파업하다 잘린 조 선생. 세명이 한 팀 되어 베트남 지사에 간다. 이쯤에서 나는 문득 '이태원 클래쓰'가 생각나며 베트남에서 크게 성공해 그들을 무시하던 회사 사람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하하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푸하하하 나도 참. 


경애의 엄마는 들어와서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세탁기를 돌리지 않아 아무 바구니에나 수북이 담긴 경애의 지난 계절의 빨래들을, 여름이 왔는데도 그렇게 방치된 점퍼와 티셔츠, 양말, 장갑, 담요와 속옷들을.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구겨버린 것처럼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경애를. 경애 엄마는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시작해 저녁까지 이어진 그 빨래는 세탁기를 일곱 번 돌려야 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경애 엄마는 그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그날 다 해냈는데, 그렇게 해야 경애가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경애의 과거 이야기다. 실연으로 무너져 꼼짝 못 할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어질러진 방을 치우며 곁에 계셔주신 엄마 도움으로 결국 일어선다. 그렇게 아픔을 주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떠난 옛 애인 산주가 몇 년 만에 다시 경애 앞에 나타난다.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 연민과 사랑이 다시 피어나지만 아내 올 시각엔 어김없이 떠나는 그를 보며 크게 실망한다.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날 밤, 경애는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오래전 산주와 헤어졌을 때 유일하게 대화를 나눴던 페이스북의 연애 상담 페이지를 떠올렸다. 몇 년간 들어가지 않아서 계정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몇 번의 검색으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지였다. 


경애가 실연당해 괴로울 때 상담받았던 페이스북 '언니는 죄가 없다'에서 상담해주던 언니가 여자가 아닌 바로 상수라는 것, 호프집 불났을 때 죽은 경애의 친구가 바로 상수의 소중한 친구인 것 등 경애와 상수는 이렇게 저렇게 이미 과거에 연결되어있었다.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10월이 어느 깊은 가을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밤 내내 여러 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 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경애와 상수가 함께 하는 흐뭇한 장면으로 끝난다. 둘이 오래오래 사랑하며 아픈 상처를 보듬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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