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남구 수변공원
남편과 나는 늘 수변공원을 걷는다. 이십여 년 전 우리가 처음 울산에 올 때 이 곳은 나무판 등으로 얼기설기 메꾸어져 있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었다. 절대 낚시 금지!!!라는 팻말만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정말 험악한 곳이었다. 그런데 발상의 전환이랄까 어느 날 짜잔~ 수변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다. 커다란 판자의 흉측한 울타리 속에 이토록 아름다운 호수가? 모두 놀랐다. 호수를 둘러볼 수 있도록 주변엔 산책로까지 멋지게 조성되었다. 공업용수인 이 저수지는 맑은 물을 유지해야만 하는데 금지구역으로 해오다 차라리 공개로 바꾸었으니 얼마나 멋진 발상의 전환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시사철 변하는 주변의 꽃들을 보며 맑은 호숫가 산책로를 걷는다. 그런데 어느 날!
깃발이 곳곳에 펄럭이는데 제목이 봄맞이 걷기 대회! 오예! 매일 어차피 걷고 있는데 걷기 대회라니? 재밌겠다. 가끔 이런 플래카드를 보아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그저 지나쳤는데 이번엔 다르다. 매일 나랑 남편이 걷고 있는 바로 이 곳에서 걷기 대회를 한다니. 어떤 것일까? 호기심 천국인 나는 한 번 참가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혼자는 좀 재미없다. 그렇지. 함께 등산 다니며 자주 모이는 친한 부부들에게 바람을 넣기 시작한다. 우리 어차피 걷는데 저 걷기 대회에 참가하자. 그래서 함께 신나게 걷자. 그런 행사 뻔하다며 가면 후회한다며 안 가겠다는 사람들을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래 겨우겨우 동원에 성공한다. 내가 혹했으면 나만 가면 될 일이지 난 왜 이렇게 여러 사람 몰려가려 하고 그 동원 역할을 자진해 맡는 것일까. 내참.
8시 시작인데 한 30분 전에는 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이고 7시 반은 너무 일러요. 그래도 8시 시작인데. 그렇게 저렇게 절충하여 나온 시각이 7시 40분. 우리는 7시 40분까지 그 행사가 열리는 축구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처음 참석하는 이런 구청에서 하는 행사. 과연 그냥 걷는 거랑 무엇이 다를까? 여러 사람이 함께 걸으면 훨씬 재미있겠지? 두근두근 새벽부터 일어나 설쳐대며 영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끌고 정확히 만나기로 한 시각에 축구장에 도착한다.
인조잔디가 파랗게 쫘악 깔려있는 축구장. 이미 접수대라고 쓰여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모두 참석. 하하 가기 싫다 했어도 나의 동원에 기꺼이 응해준 고마운 분들. 동료 중 한 분이 어디서 따끈따끈 맛있는 커피도 얻어온다. 부스마다 생수 나누어 주는 곳. 커피 주는 곳, 뻥 투기 주는 곳, 건강검진해주는 곳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접수하려 줄을 서 있는데 하하 무언가 큰 대회에 참가한 것 같아 막 신이 난다. 접수대란 별거 아니고 스티커로 된 번호표를 한 장씩 나누어주며 잃어버리지 마세요 중요한 겁니다~ 한다. 나중에 행운권 추첨할 때 이 번호로 한다며 잘 챙기란다. 우리는 가슴에 팍팍 그 커다란 번호를 붙이고 흐뭇하다. 아 그런데 날씨가 너무 쌀쌀하다.
그렇게 시작은 좋았다. 약간의 설렘과 흥분. 생수를 지급받고 양지바른 곳에서 기다린다. 그런데... 아 그런데.... 옷 속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한기하며 가만히 있으니 봄 옷을 입고 나온 우리는 너무 추운데 그런데 시작을 안 한다. 7시 40분에 와서 접수하고 이제 8시 시작이라고 했으니 8시 되기까지는 기다려야지 하지만 8시가 훌쩍 넘어가도 시작은 하지 않는다. 모지? 8시 반이 넘어가며 드디어 나에 의해 동원된 그 부부들 짜증 폭발. 심지어 나의 남편까지도! 가자! 왜 이 추위에 떨며 여기서 마냥 기다리냐? 8시에 시작한다 해놓고 이게 무엇이냐? 그래도 조금만. 이제 곧 시작하겠지. 아니 안 해. 그냥 어차피 걷는 것. 우리끼리 걷고 가자.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리고 또 흘러가는 시간. 시작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흥분한 동료들은 씩씩거리며 그 자리를 떠난다. 그냥 걷자! 따라올 테면 따라오고 말 테면 말아!
사실 난 할 말이 없다. 그런 행사 가봤자 뻔하다고 왜 그런 데 가려하느냐며 도리어 나를 말리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 동원했으니 제발 이들이 만족하게 되기를 기대했는데 춥기만 하고 제시간에 시작도 안 하고 엉엉. 날씨라도 포근하면 모르겠지만 봄 옷차림으로 나온 우리는 그 꽃샘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여하튼 난 혼자 남을 수 없어 그들을 쫓아간다. 그냥 우리끼리 걷는 것이다. 아. 차라리 진작에 와서 걷기라도 할 걸. 그냥 마냥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줄 알았지. 돌고 돌고 돌아 한참을 걷고 나니 시간은 9시 20분경. 설마 아직도 시작을 안 했을까?
축구장으로 가본다. 세상에. 아직도 걷기 출발을 안 했다. 그래? 그렇다면 하고 빈자리에 앉아본다. 9시 40분이 되어서야 개회사가 시작된다. 그 이전엔 식전행사라고 농악대의 연주와 주부들의 댄스가 있었다. 우리가 수변공원을 돌고 와서도 그런 행사다. 그리고 9시 40분에야 남구청장을 비롯해 내빈들 소개가 이어지며 인사말과 걷기 대회 개회식이 시작된다. 음.... 그리고 걷기 대회라는 둥근 아치를 향해 가라한다. 걷는 것 시작한다고. 음음음. 그렇다면 왜 시작이 8시라고 했을까?
나의 백넘버는 131번. 우리는 백번대의 번호. 1900번대의 백넘버를 본다. 그러니까 플래카드에 붙은 시작시간에 맞추어 그보다 일찍 와서 착하게 준비한 사람은 바보처럼 추위에 한참을 떨어야 했고 그냥 걷기 대회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나와 걷다가 접수대에 간 사람이나 이런 행사는 늦게 가도 돼 하면서 9시 반 다되어 온 사람들은 오자마자 행사가 시작되었을 테니 이 무슨 불공평이냐.
드디어 걷기 대회가 시작한다. 10시가 다 되어서이다. 세상에 8시에 시작이라 하고 10시에야 시작하다니. 식전 행사를 보며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서서 이 걷기 대회 아치 앞에 자리를 잡는다. 찰칵찰칵 여러 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나도 거기 껴서 찰칵 나의 핸드폰 셔터를 누른다.
농악대가 걷기 대회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쿵쿵 쿵쿵 신명 나게 꽹과리를 울리며 출발하는 우리를 환송한다. 그야말로 봄은 무르익었고 걷기 대회의 시작이다. 출 바아 아아 알~
그래도 함께 수변공원을 미리 걸으며 어느 정도 화가 풀린 틈새를 타 난 정식 행사에서 다시 걷자 하며 그들을 마구 꼬신다. 분명히 만족할 무언 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겨우 꼬셔 다시 모두 함께 걸으니 중간중간에 간식도 나누어 주고 플라스틱 반찬통도 준다. 걷다가 사람들이 쫙 줄 서서 그걸 받는다. 아, 이런 재미인가? 우리도 빵과 주스를 받아 양지바른 곳에 앉아 먹는다. 그렇게 우~ 몰려가는 사람들 따라 다시 한번 수변공원을 걷는다. 이제 이렇게 축구장으로 가서 행운권 추첨을 하는가 보아? 난 그런 행운권이 정말 당첨 잘 되거든? 그러니까 우리 그 행사에 참여해보자. 하며 다시 그들을 축구장까지 끌고 간다.
헉. 백넘버 9번이 보인다. 캬~ 저 사람은 얼마나 일찍 온 걸까? 어쨌든 공연장 앞에 펼쳐진 의자에 앉아 행운권 추첨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그런데 노노노 식후행사라며 안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한다. 나에게 끌려 온 그들의 원성이 다시 시작된다. 도저히 땡볕을 견딜 수 없어 저기 시원한 정자에서 기다리겠다며 나가버린다. 그래도 난 행사장을 지킨다. 난 정말 이런 행운권이 잘 당첨되니까. 그런데 아... 정말 하늘에서 쨍쨍 내리쬐는 햇빛을 피할 길이 없다. 행사위원은 모두 부스 안에 있는가? 이 땡볕을 도저히 어쩔 수는 없는 걸까? 힘들게 행사장을 지키고 있는데 시원한 정자에 나가 있던 동료들이 와서 나를 끌고 나간다. 이 땡볕에 왜 그러고 있느냐고. 그래서 결국 행운권 추첨은 보지 못했다.
이런 곳에 동원한 나의 호기심천국이 질타를 맞아 나는 사과의 뜻으로 짜장면과 짬뽕과 탕수욕을 쏜다. 참 이상하다. 8시 시작이라 해놓고 왜 정작 시작은 10시에 하는 걸까? 자기들 준비과정도 모두 시작시간에 넣은 것일까? 내빈들은 9시 반 출석이었을까? 그나마 내빈들 중 누군가 지각해서 9시 40분에야 시작한 것일까? 모처럼 동원해간 사람들에게서 정말 잘 왔네~ 하는 감탄이 아니라 도리어 원성을 받으니 에고 왜 그랬나 싶다.
그 막연히 기다리는 시간. 일찍 와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차라리 안내를 해주면 안 되었을까? 식은 10시에나 시작되니 그 이전에 먼저 수변공원을 돌고 오세요라든가. 무언가 말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헐레벌떡 온 사람은 기다림의 견디기 힘든 시간이 없어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일찍 온 사람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끝까지 행운권이라는 미끼에 그 땡볕 아래 식후행사마저 모두 보려 한 내가 바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