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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14. 2020

새벽 다섯 시

너무 힘들어 대충 정리하고 둘이 침대에 누워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작년에도 그랬다. 우리 둘이 김장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시계를 봤을 때 딱 새벽 다섯 시였다. 하. 난 어쩜 이렇게 일을 못할까? 김장이라는 것을 안 하고 시부모님께 얻어만 먹다가 몇 년 전부터 은퇴한 남편과 둘이 김장을 하고 있다. 그렇게 둘이 만들어 먹으니 사는 김치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그 집 김치의 맛. 어설픈 대로 우린 우당탕당 매년 김장을 하고 있다. 아 그런데 당일치기 시험도 아니고 그야말로 밤을 꼴딱 새우다니. 어쩜 이렇게 밖에 못할까? 그러면 또 어떠랴. 남편과 둘이서 널따란 거실 한가득 어질러 놓고 TV 다시 보기 삼광 빌라를 켜놓고 세월아 네월아 하다 보니 밤을 꼴딱 새웠다. 


느긋하게 장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김장. 일요일 아침을 느릿느릿 먹고 쇼핑백을 든든히 챙긴 후 장보기에 나섰다. 김장시장이 한창이라 그 넓은 농협에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아삭하다는 평창 고랭지 배추를 사고 알타리도 사고 무도 사고 동치미 무도 산다. 동치미는 이미 담갔지만 다 먹어가기에 더 담기 위해서다. 싱싱한 붉은 갓도 사고 육젓 할까 오젓 할까 망설이다 오젓을 사고 생새우도 사고 생굴도 사고 양파도 사고 쪽파도 사고 대파도 사고 생강도 사고 마늘도 산다. 모든 장보기를 끝내고 차는 주차시킨 채 바로 옆에 있는 코스트코에 간다. 거기서 콜라와 불고기 피자 한 조각을 산다. 단돈 사천 원이지만 피자도 크고 가성비 정말 맛있다. 어른이 계신 것도 아니요 우리 둘이니 맘껏 느려 터지게 해도 된다. 그렇게 온갖 것 참여하며 구경하고 하다 보니 어느새 짧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코스트코 빨간 쇼팽 백 무려 네 개에 가득가득 담긴 김장거리들. 낑낑거리며 19층 집에 들여다 놓으니 갑자기 울리는 나의 핸드폰. 엄마 전화다. 어? 웬일? 주로 내가 안부전화를 드리지 전화 않으시는 엄마이기에 너무 놀라 나의 말도 짧다. 


"아, 엄마. 왜?"


세상에. 응급실이란다. 산책 나오셨다가 살얼음을 디뎌 넘어져 팔이 부러지셨단다. 아니, 눈 온다고 난리인 날에 왜 나가셨어요? 좀 일찍 나가시지 다 어둑해서 왜 나가셨어요? 하이고 아니 어쩌자고 이 추운 날 게다가 눈까지 온날 다 늦게 나가 넘어지십니까. 엄마 말을 들으며 다다다다 쏟아지려는 잔소리를 황급히 거두어들인다. 이미 벌어진 일. 지금 그걸 다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넘어지셨고 혼자 일어나셨고 혼자 바로 근처의 병원에 가셨단다. 응급실이고 엑스레이 찍고 지금 깁스를 하였으며 곧 CT촬영을 하신단다. 아무도 없는데. 정말 아무도 없는데. 


우린 도무지 삼 남매인데 오빠는 미국에 남동생은 캐나다에 딸 하나인 나는 울산에 있다. 두 분만 사시다 아버지가 7년 전 돌아가셔 엄마 혼자다. 손주들 마저도 모두 해외에 있다. 88세 엄마 혼자 사시는데 아직까진 건강하셔서 아무 탈 없는데 그런데 넘어져 팔이 부러지셨으니 큰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달려갈 수 있는가? 김장하겠다고 잔뜩 장을 봐온 상태인데 어쩌나. 


"그래도 왼팔 다치기를 어디냐. 걸을 수도 있고 오른손으로 뭐든 할 수 있고." 


우리들 걱정과 달리 엄마는 도리어 씩씩하시다. 혼자 응급실에서 치료도 다 받으시고 이제 화요일에 교수 진찰을 받으면 된단다. 다행이다. 난 김장을 끝내고 남편이 며칠 있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저녁 열차로 엄마에게 간다. 나쁘게 생각하면 하필이면 왜! 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긍정적 사고처럼 왼팔이니 얼마나 다행이야~ 로 무장하니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어차피 일어날 사고라면 일어난다. 엄마 큰 사고당할 거 액땜했다 치세요. 그래. 경고야 경고. 한겨울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는 경고. 그렇게 받아들이시니 다행이다. 촬영 결과 손목 근처가 많이 부러지셨단다. 젊은이라면 수술을 하겠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수술 않고 깁스와 약으로 한단다.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사고는 항상 아차 하는 순간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꼬. 가서 넉넉한 웃음을 마구 팔며 별일 아닌 듯 힘을 실어드려야겠다. 


평안한 일상은 누릴 땐 모르는 것 같다. 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글도 쓰고 이런저런 것들로 매일매일이 신나던 내게 갑자기 모든 게 올스톱이다. 서울 가기 위해 김장을 서두르고 모든 준비를 한다. 그래도 노트북은 챙겨간다. 엄마와 함께 하며 행여라도 남는 시간엔 다시 이런저런 글을 써야지. 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실 테니까. 파이팅!


(사진:꽃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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