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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언철 Apr 21. 2022

제가 그런 감사의 말을 들어도 될까요?

그 환자를 본 건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었던 환자의 첫인상은 왜소했고 아직 앳된 얼굴을 한 20대 초반의 여학생이었다. 환자는 골반까지 진행된 종양으로 움직이는 것도 힘든 상태였고 통증으로 자세 변경도 힘든 상황이었다. 환자가 시행 받은 수술은 종양을 근치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닌 통증 경감을 위해 종양 축소 수술을 했고 수술 후 관리를 위해 전원을 오게 되었다. 보호자로 아버지가 동행하였고 타지에서 길어진 입원 기간으로 환자와 보호자는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사실 나는 선배에게 전원 부탁을 받고 전원을 결정하기까지 주저했다. 뼈에 암이 생기는 골 육종이라는 질환이 나에게 생소 했고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코로나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병원 입원이 쉽지 않았고 연고지 문제로 우리 병원으로 오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었다. 환자 보호자에게서 받은 매우 두꺼운 환자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고 나는 아주 많이 놀랐다.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여러 차례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거의 매년 그렇게 힘든 치료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든 치료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곁에는 가족들이 그 힘든 과정을 같이 감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전원을 주저했던 내가 오히려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입원을 했을 때는 짧은 입원 기간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퇴원하기까지 2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수술한 부위에 농양이 생겨 제거해야 했고 항생제 치료를 해야 했다. 그리고 환자의 통증이 잘 조절되지 않아서 시간이 꽤 길어졌다. 그래도 환자와 보호자는 꿋꿋하게 잘 견뎌내고 퇴원을 할 수 있었고 퇴원을 진행했을 때 나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잠시 환자와 보호자를 잊고 지내던 중 환자 보호자가 외래로 찾아왔다. 퇴원 후4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였다. 다시 환자의 통증 조절이 안되고 식사를 거의 못한다고 했다. 통증 조절을 위해 지난 번처럼 종양 축소 수술을 받고 싶고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고 싶다고 하셨다. 우선 입원하여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환자는 입원하고 보니 이전보다 더 쇠약해져 있었고 자세 변경이 안되고 영양 섭취가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욕창이 많이 심해져 있었다. 환자는 먼저 전반적인 교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종양이 커지다 보니 요관이 눌리면서 폐색이 생겼고 그와 더불어 요로감염이 생겼다. 요관 폐색은 신장에 관을 꽂아 소변을 빼내야 했고 요로감염은 항생제로 치료해야 했다. 수혈 및 수액으로 여러가지 성분을 보충하여 교정하였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통증 조절이었다. 환자가 겪는 통증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발생하여 조절이 쉽지 않았다. 환자는 많은 양의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마약성 진통제가 과다 투여될 경우 부작용에 대해서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절충점을 찾아서 조절을 했다. 그렇게 통증도 조금은 조절이 되었지만 완전히 깨끗하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환자가 나에게 통증 조절을 위해 수술을 하고 싶다고 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내 의견을 이야기했다.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 통증 경감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 모르겠고 오히려 수술 후 생기는 통증이 지금의 통증과 더해져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외과의사 입장에서는 환자에게 수술 후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환자와 보호자는 다시 한번 고민해 보겠다고 답했다. 다음 날 나는 환자에게 물었다. “수술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수술하고 싶어요?” 환자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본인의 결심을 보여주었다. 환자는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어낼 수 있다면 수술을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더 이상 내 생각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다시 입원하고 한달만에 수술을 진행했다. 종양 전체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큰 혈관이나 주요 장기가 종양과 한 몸이 되어 있어 무턱대고 무리하게 제거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 종양을 제거했던 부위로 다시 접근하여 종양을 최대한 제거하였다. 종양을 제거한 부위로 농양이 생기지 않게 조치를 취하고 수술을 종료했다. 환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마취에서 잘 깨어났고 잘 회복하였다. 이전의 많은 수술을 이겨낸 것처럼 이번에도 잘 견뎌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통증 경감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극적인 호전은 없었다. 그래도 환자 보호자는 수술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고마워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양을 제거했던 부위로 다시 종양이 자라났다. 수술 전에도 식사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는데 수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넘기면 금방 토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양한 검사를 해서 그 이유를 찾고 싶었지만 조그만 움직임에도 통증을 느끼는 환자에게 권할 수도 없었고 환자와 보호자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회진 때 최대한 음식을 잘 먹어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다였다. 입원한지 2달이 다 되어가는 즈음 환자는 퇴원을 하고 싶다고 했다. 환자 보호자도 집에 가서 편한 환경에서 환자를 돌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동의를 했고 두 번째 입원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환자가 퇴원하고 난 빈자리를 보며 곧 다시 입원하게 될 거 라는 예감과 그것이 환자의 마지막 입원이 될 거 같다는 슬픈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스쳤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퇴원한 지 5일 만이었다. 식사 진행이 안되어서 다시 입원해야 했다. 이제는 반복적인 구토가 문제였다. 항구토제를 써도 증상이 조절되지 않았다. 열도 나고 있었고 다시 항생제를 시작했다. 환자가 힘들어하는 부분을 해결해 주고자 했지만 시술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쉽지 않았다. 환자를 마주해야 하는 하루 두 번의 회진이 나에게는 매우 힘이 들었다. 환자에게는 더 이상 해줄 만한 것이 없었고 보호자에게도 섣불리 어떤 말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오늘 통증은 어땠는지 식사는 좀 했는지를 물었지만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을 나와 환자 그리고 보호자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그 물음 뒤에는 호전이 되고 있냐는 뜻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환자와 보호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러던 중 환자의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들의 수가 줄어드는 범혈구 감소증이 발생했다. 치료제도 잘 듣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환자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담당 간호사 선생님과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를 받는 것에 대해 상의했다. 그런데 그 말을 환자에게 꺼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환자에게 본인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나는 환자의 아버지에게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설명하였고 여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환자의 아버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다 안다고 했다. 가족들도 느끼고 있다고... 아마 본인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라고… 본인이 상황을 봐서 딸에게 천천히 이야기하겠다고... 한참을 흐느끼시는 환자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나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렵사리 참았다.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긴 시간 지켜봐 왔을 부모의 심정을 어떤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건 인간을 만든 신일지라도 모를 심정일 것 같았다. 그저 내가 건넨 위로의 말이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며칠 후 환자는 연명치료 중단에 본인이 서명을 하고 동의했다. 난 전담 간호사 선생님께 부탁을 하고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자리에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무기력함과 이 힘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며칠이 흐르고 범혈구 감소증이 더 심해져 격리실로 옮긴 어느 날 환자의 어머니가 병실에 와 계셨다. 딸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었는데 환자가 환히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환자는 그 순간 아무런 통증도 없어 보였고 행복해 보였으며 마치 회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좋아 보였다. 그런 행복한 시간에 내 존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모녀는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별다른 말없이 얼른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 환하게 웃는 밝은 모습이 내가 본 환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환자의 장례가 끝나고 환자의 아버지가 내 외래로 찾아왔다. “선생님 우리 딸에게 편하게 잘해줘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전담간호사 선생님,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 너무 감사합니다.” 그 말 전하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그 순간 이 감사의 말을 내가 들어도 되는 것인가라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름의 최선이었는지 모르지만 의사로서 무기력했던 것 같고 해준 것이 없는 것 같고 더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았다. 회진 때 할 말이 없어 피하고 싶어 했던 나 자신이... 환자의 고통을 더 덜어주지 못한 나 자신이...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환자 보호자의 마음을 더 보듬어주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운 나머지 그 감사의 말을 들어도 되는 것인가라는 자문을 했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고 그 눈으로 울고 계신 보호자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10대와 20대 한참 꿈 많은 시절을 병실에서 병마와 싸우느라 보낸 환자가 이제는 좋은 곳에서 통증 없이 편하게 두 발로 서서 어디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환자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가족들도 마음의 위안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입원 병실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담당 간호사 선생님,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과 치료를 위해 힘써 주신 병원 직원분들께도 깊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한없는 위안과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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