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 부탄(1)
흰 바탕에 커서만이 깜빡깜빡. 보고서 상단에는 18포인트 명조체로 제목만 큼직하게 반짝일 뿐 한 시간 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주간업무보고에 마무리하기로 한 보고서 '태아 미확정 계약 정비(안)'의 디데이였다. 상무님까지 보고되는 내용이라 초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이틀 전 소개팅으로 만났던 여자 친구와 두 달 만에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섯 시에 만나자, 너무 늦지 않아? 영화 계획을 세우다가 시작된 사소한 말다툼은 나름 그동안 소원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시간으로 진화하였고 계속 이럴 거면 만나지 않는 게 낫다는 마무리로 끝났다. 나름 서로 손절이라는 형식으로 깔끔하게 끝났다. 신선한 헤어짐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는 자동적으로 핸드폰을 향했다. 왜 고객들은 태아보험을 들고 난 이후에 출생하면 연락 한통 않는 걸까 생각하다가도 수십 번 카톡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까똑까똑. 대학 동기와 후배들이 온 카톡만 20개 ~ 30개로 불어날 뿐, 원하는 카톡은 오지 않았다. 어느덧 오전 11시. 애초에 이런 중요한 기안을 삼일 만에 쓰라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오부장의 목소리가 뇌 속에 메아리치는 것만 같다. 야 여기 너보다 더한 경우도 많아. 너는 공과사도 구분 못하냐? 비록, 본인 자녀 수능 시험 때는 그렇게 예민했지만 말이다. 자신의 불행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밑에 직원은 음.. 알게 모야. 일만 잘하면 되지. 대부분의 상사는 그럴 것이다. 갑자기 바탕화면 오른쪽 밑 미리보기로 대화창이 하나 올라온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보고서는 마무리되어가나"
"죄송합니다. 아직 구상 중입니다."
"1차로 가져와라. 언제까지 가능하지?"
"최선을 다해서 빨리 해보겠습니다"
오부장이 제일 싫어하는 대답이다. 확답보다는 최선, 열심히라는 대답을 하는 것. 하지만 정말 기약 없을 때는 매도 먼저 맞는 이런 대답이 낫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
"아.. 제가 오늘 근처 기자 친구가 온다 해서요. 죄송합니다."
그런 날이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갑자기 숨 막힘으로 다가오는 순간. 부서 사람들과의 점심도 가끔 그랬다. 오늘 뭐 먹을래? 오부장이 좋아하는 자장면, 순대국밥, 감자탕 및 찌개류 사이의 사지선다 사이에서 감자탕 어떻습니까? 아냐 주말에 먹었어. 그럼 자장면으로 하시죠. 따위의 대화를 나누는 것. 피자, 햄버거, 김밥, 돈가스는 오답인 곳. 오부장을 중심으로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한 손으로 컵에 물을 따르며 나머지 한 손으로 냅킨을 깔고 수저 따위를 놓는 일. 그 후에 시작되는 오부장의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로 이어지는 라떼 이야기와 팀장의 취임 새. 밥 먹는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나날이었다. 끝났다고 생각 말아라. 막내에게는 시련 같은 일이 하나 더 남았다. 바로, 영수증을 가지고 엑셀로 누가 뭘 먹었는지 나누는 일. 그리고 꼭 한두명씩 제대로 입금하지 않아 보채는 일. 익숙하다가도 현타 오는 일들.
이런 일례 행사들이 지겨워질 때면 나는 광화문 주위 회사를 다니는 친구와 점심을 먹는다 이야기했다. 친구가 반복되자 구체성이 필요했다. 금호산업 경인, 대우건설 문수, 기자 원평, 외교관 호진. 몇몇은 친구로 몇몇은 후배로. 종열이 친구가 많아졌네? 아 네.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왔더라고요. 근처에 근무하는지 몰랐는데 어제 광화문에서 길을 걷다 마주쳐서 약속 좀 잡았습니다. 대학생활 열심히 했나 봐? 밥 먹으러 회사 다니는 거 같아. 핀잔 좀 들으면 어떠랴. 주로 오답 리스트 중 사람들이 많이 안 가는 곳에 갔다. 맥도널드, 편의점 컵라면, 조그만 골목 속 분식집.
오늘도 그랬다. 없는 친구를 만들어내며 사지선다 문제에서 해방되어 (현재는 없어진) 시청 뒤 맥도널드로 갔다. 맥날 2층 창가에 앉아 빅맥을 씹으며 콜라를 한 모금 쭉 빨아 마셨다. 주위에는 젊은 직장인들이나 나같이 한 끼를 그저 때우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허기 알림은 꺼줘야 하고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지 않을 때 나만의 쉼을 찾아온 사람들. 우걱우걱. 창문으로 보이는 시청은 점심을 먹으러 바쁘게 걸어 다니는 직장인과 확성기로 민중가요를 틀며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 사람들도 누군가는 오늘 헤어졌거나 상사에게 깨졌겠지. 월화수목금 일하고 깨지고 주말에는 소개팅을 하며 어디 사는지 무슨 책을 혹은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나날들. 오늘 같은 날 오 부장은 분명 기안을 지키지 않는 사원 대리들의 무책임함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 것이다. 애초에 왜 그런 일정이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겠지. 햄버거를 입에 넣으며 가슴속 언저리에서 올라오는 오후에 깨짐 예약 일정을 콜라와 함께 꾹꾹 눌러 담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스트레스 상황에서 혼밥은 오늘을 다시 버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 준다.
맥도널드를 나와 회사를 가던 길, 운 없게도 밥을 먹고 나오던 부장, 팀장, 사수와 마주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하하. 친구가 인터뷰가 있다고 밥만 먹고 가버렸네요." 어색한 웃음, 오그라드는 발연기. "시간도 남았는데 커피 한잔 마시고 들어가자." 맥도널드 앞 스벅으로 향했다. 팀장은 선택 장애가 있다. 항상 정확한 메뉴명을 말하지 않고 '요즘 많이 팔리는 걸로~~', '어~~ 그 달달한 거.' 또는 '커피 아닌 거 아무거나.'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다. 가끔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때려주고 싶다. 커피를 앞에 두고 대화하는 네 명. 기안은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훈계가 지나가고 신변잡기 타임이 시작되었다. "종열이는 오랫동안 사귄 여자 친구 하고는 잘 지내지?" 내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가 전혀 안되어있는 오부장.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그 친구와는 삼 개월 전에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다가 엊그적게 또 헤어졌다네요. 그러길래 빨리 결혼하라고 했지"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말하는 사수. 저기요 이거.. 내 일이거든요. "한번 더 헤어지면 올해 트리플 크라운이네. 그것도 능력이지 뭐. 허허허. " 옆에서 팀장이 거든다. 정말 진 심 으 로 가끔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때려주고 싶다. 오 부장이 상기된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위로를 건넸다. "일 열심히 하고 있다 보면 더 좋은 사람 만날 거다. 나도 말이야. 몇 번을 헤어졌는데..." 시작되었다. 오부장의 휘핑크림 가득한 라떼이야기. 아주 그냥 난장판이었다. 혼밥의 위로는 안드로메다로 가고 가슴속 깊은 곳으로 보내 놓았던 우울이 다시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자리에 오니 메신저가 하나와 있었다. 오부장이었다.
"기분도 울적할 텐데 술이나 한잔할까?"
"약속도 없는데 알겠습니다."
우울할 때 칼퇴만큼 큰 치료제는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아는 그걸 오부장은 모른다. 우울한건 같이 풀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예전보다 사람은 조금 바꼈다. 기안 못지킨 보고서에 대해 아무말 하지 않고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뒤풀이 장소는 회사 뒤 2층에 위치한 중국집이었다. 멤버는 부장, 팀장, 사수 나. 그래, 아까 그 대환장 멤버다. 탕수육, 짬뽕을 안주삼아 소주를 기울였다. 오부장의 연애와 회사를 넘나드는 시련 극복사와 팀장의 취임 새, 그리고 사수의 참견이 어우러져 대 환장 굿 한판 진행 중이었고 나는 술잔만 꼴깍꼴깍 넘겼다. 그리고 인사불성 취해 잠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녀의 행복을 내가 가졌으니~."
눈을 뜨니 노래방이었다. 아니! 이 노래는? 오부장은 엉덩이를 지그재그로 흔들며 엄정화의 포이즌을 부르고 있다. 사수는 탬버린을 팀장은 앉아서 노래책을 넘기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잠이 덜 깬 상태로 일어나서 탬버린을 흔들며 오부장의 비위를 맞춰준다. 중학교 친구 중 엄정화의 팬이 있었다. 콘서트 가서 악수했다고 손장갑을 끼고 오던 녀석. 엄정화의 노래는 그녀만이 가능하다며 누군가 따라 부르면 쏘아봤던 녀석. 이 곡을 부를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났다. 오부장이 이렇게 곡을 망치고 있는 걸 알면 걔는 얼마나 싫어할까? "오 일어났냐. 오늘은 울적할 텐데 강남스타일 안불러도 돼." 사수와 팀장은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느덧 남은 시간 5분. 오부장이 말했다. "오늘은 종열이 위로하는 자리니까 마지막 곡은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자." 그렇게 넷이 어깨동무를 하고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기나긴 하루는 이렇게 끝이 났다. 보고서로 시작해 행복의 나라로 끝난 하루. 갑자기 행복의 나라라니 나 원 참, 이런 게 진짜 위로라고 생각하는 걸까. 행복의 나라라는 게 있는 걸까? 집에 와 무심코 네이버에 '행복의 나라'를 치고 엔터를 누른 채 스르르 잠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