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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Nov 17. 2019

십팔번의 비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꽂힐 것 같다. 오부장은 일분이 넘도록 내 보고서의 같은 곳만 바라보고 있다. 부장님 거기 똥이라도 묻었습니까? 목 끝까지 나오는 단어들을 마음속에 집어넣는다. 시간이 재깍재깍 흐르고, 오부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내가 또똥을... 밟았네?

"야! 너는 신입 때 놀았냐. 품의서에 무슨 내용이 하나도 없냐. 다른 부서에서 이거 가져가서 보면 나를 뭐라 생각하겠냐."

한숨을 푹 쉬면서 결재판으로 책상을 '탁' 치기 시작한다.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지듯 오부장의 한마디에 부서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디테일 없는 무조건적인 갈굼과 비난. 목소리에는 신경질이 한가득.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무엇을 가져가도 십중팔구 깨지는 그날이구나. 신입 때 놀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렇게 혼날 거였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오부장은 책상 속에 있던 서류 속에서 내 인사 기록지를 찾고 극딜을 시전 한다. 

"넌 대체 이 학교를 졸업했냐. 여기는 또 어떻게 왔고. 너 같은 애 한 명이면 6급 여직원 두 명이야. 돈이 아깝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입이 없어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신입사원 때 뭐했니 라는 질문에 한두 마디로 대답하기에는 그동안 회사에 적응하기 위한 내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고 왜 이렇게 썼냐라고 하면 도대체가 할 말이 없었다. 마음속 빈정거림만 늘었다. "제가 어떻게 왔는지는 인사팀에 물어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8601.. 연결해드릴까요?" 이라던지. "지금 전문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연봉이 낮게 책정되는 6급 여직원의 채용의 부당함을 이야기하신 거죠?" 등등. 입 끝까지 씰룩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온한 생각은 뱃속에 꾹꾹 누르고 그럴때마다 팀장님이 이야기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와 카드값을 마음속에 되새긴다. 내가 괜히 소띠가 아니라고.

오부장의 그날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모두에게 극딜을 시전 한다는 것. 내 품의서로 시작한 갈굼은 직급을 타고 올라가 팀장에서 끝났다. 고성 속에 간간히 들리는 "너 나 엿 먹이려고 팀장 하냐.", "도대체 차장이 돼서 모하냐. 그렇게 월급 받아먹으면 좋냐." 같은 소리들. 팀장은 부장과 나이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 팀원의 융합을 우선시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직급이 깡패란 이유로 매번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래 팀장도 저런 소리를 듣는데, 나 정도면 뭐.' 두 번째 특징은 회식이었다. 삭막해진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며 회식을 소집했다. 당근과 채찍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개처럼 깨지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즐거운 척 이야기하는 회식은 메소드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힘든 일이었다. 회식은 보통 그분의 취향 따라 중국집이나 고기를 먹은 후 자연스럽게 노래방으로 가는 코스였다. 그날도 그랬다.

" 널 뒤로한 채 그냥 걸었어 미안해하는 널 위해~"

 98년 멜론 차트 1위 곡에 빛나는 엄정화의 포이즌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기억된다. 오부장의 애창곡으로 말이다. 노래방에 들어가는 순간 착석하기 무섭게 누르는 번호 5548번. 기계음과 함께 시작되는 인트로에서 팀장은 키를 남자로 바꿈과 동시에 마이크를 부장님께 그리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는 나에게 탬버린을 던졌다. '지금이야!' 사각지대 따위는 없는 곳. 권유와 지시가 묘하게 섞인 상황에서 노래에 맞춰 묵묵히 탬버린을 치며 허리를 돌리는 시간이었다. 젊은 사원은 탬버린과 댄스곡(혹은 트로트)과 함께 노래방의 3대 구성요소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본인의 곡을 마치자 오부장은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으며 우리를 지긋이 둘러본다. '어디~ 재롱 좀 떨어봐.' 팀장님은 내생에 봄날은 부장님과 함께하는 지금이라며 [내생에 봄날은]을 차장님은 노래방 회식의 이 밤이 좋다며 [밤이며 밤마다]를, 사수는 잔망스럽게 농구하는 모션을 하며 [마지막 승부]를..신입 여자애는 자의 삼십 타의 칠십으로 [내가 제일 잘나가]를 불렀다. 나 원 참,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다들... 말을 말자. 이해하자.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순서는 돌고 돌아 이윽고 내 차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부서 내의 곡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는 노라조의 [카레]를 불렀는데 부장과 팀장이 모르는 곡이라 분위기가 나가리였다. 카레정도면 시체도 벌떡 뛸 곡인데 말이죠. 그다음에는 [붉은 노을]을 불렀다. 나름 다들 방방 뛰고 웃으며 놀았는데 끝나고 오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너네끼리 가도 이런 거 부르냐. 억지로 옛날 노래 부를 필요 없어. 편하게 해, 편하게."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이 던전에서는 무엇을 불러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만? 얘기를 들었을때는 윤종신의 [좋니]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부장아, 이렇게 노니까 좋니? 너무 올드하지도 않으면서 오부장도 흥을 낼 수 있는 아는 곡. 노래방에서 회사용 십팔번 곡을 고르는 과정은 어려웠다. 이번에는 쿨 노래를 불러볼까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야 너. 강남 토박이자나. 강남스타일 한번 불러봐."라며 오부장이 거든다. 평소에 옷 입는 것부터 머리스타일까지 강남 사람 아닌 거 같다고 구박할 땐 언제고, 한 번도 안 불러본 곡을 부르라니. "강남스타일은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어서요." "에이~ 강남스타일은 말춤만 잘 추면 돼." 옆에서 사수가 나를 슬쩍 보며 무언의 메시지를 날린다. '잊지 마.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이야.' 이해하자.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누구나 낯선곳은 있다. 나는 한국에 살지만 남들이 쉽게가는 제주도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뭔가 주말만 쓰고 갔다오자니 아쉽고 길게 휴가로 가고자하면 쉽게 갈 수 있으니까 뒤로 밀렸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수다대장이 되던 나도 제주도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꾹 닫혔다. 오지라는 곳을 꼭 교통이 불편한 도시만을 뜻하는게 아니라 마음의 거리도 포함된다 하면 나는 일순위로 제주도를 꼽을 것이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흔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낯선곳이 된다. 도곡동도 그렇다. 타워팰리스로 상징되는 비싼 집값과 사교육, 그리고 보수로 상징되는 동네. 동경과 시샘을 두루 갖게되는 동네. 회사사람들은 평생 도곡동에서 살아온 나에게 여러가지 프레임을 씌웠다. '회사는 취미생활이다.' 또는'가난함을 체험하기 위해 오지여행만 다닌다'라는 이야기는 흔했다. '소박하다'라는 좋은 프레임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 십팔번곡을 만들어줬다. 


그 후로 어떻게 됐냐고? 오부장이 있던 일 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회식 노래방 십팔번은 강남스타일이었다. 낮에는 업무에 치여 인간적인 적도 없었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사람도 아니고 여자한테 "오빠 강남 살잖아"라고 말해본 적도 없었건만, 노래방에만 가면 강남스타일을 불렀다. 느긋이 소파에 앉아있는 오부장을 보며 열심히 말춤을 추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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