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하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면서 여행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결정한 건 아니었다. 너무 막연했다. 첫 해외여행이면서 동시에 첫 장기여행이기도 했는데 이동 범위도 넓고 뭐부터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회사 생활하며 어렵게 모은 돈을 이렇게 써버려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준비하는 일이 실패할 수도 있는데 가지고 있는 돈을 최대한 손실 없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장기간의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머리를 식히고 재충전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고심 끝에 우선 러시아어 회화 책부터 샀다. 러시아어 뿐 아니라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도 공부해야 했지만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게 가장 급했다. 내가 갈지도 모르는 여행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할 텐데, 알아본 바에 의하면 러시아에서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혼자서 움직이는데 말까지 안 통하면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일단 러시아어를 공부하면서 여행을 갈지 여부를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프로그램 코드는 한 줄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낯선 언어를 익히는 건 너무나 재미있었다. 실제 여행을 가고 안 가고를 떠나서 전혀 새로운 분야의 경험을 쌓아가는 것 자체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교재에서 제공하는 원어민의 녹음 파일을 휴대폰에 저장하고 매일 산책하고 외출할 때마다 듣고 따라하는 걸 반복했다. 책 중간 중간에 러시아 문화와 음식에 대한 소개도 실려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말을 익히는 것 다음으로 한 일은 정말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면 어디서 타야 하는지, 표는 어떻게 구하고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인터넷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 본 분들이 올려주신 후기를 보며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횡단 열차를 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가격도 비행기로 가는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저렴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러시아 철도청 홈페이지를 보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6일 2시간이 걸린다고 나와 있었는데, 6일 동안 씻지도 못하고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해결하는 게 제일 먼저 떠올랐다.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난감했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나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꼭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야 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땅을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대학생 때부터 머릿속에 그려왔던 건 내가 지나가는 땅의 풍경을 보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으로 정하고 나자 다시 막막해졌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뭘 해야 할지 정해야 했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우선 러시아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로 했다. 서유럽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 내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시간과 돈을 중간에서 쓰기보다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쓰는 게 나아보였다. 모스크바에서 유레일패스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동쪽 국가인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가는 방법을 알아봤다.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기차를 타고 벨라루스의 민스크를 경유해 바르샤바까지 곧장 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차를 타고 북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후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거쳐 바르샤바까지 가는 것이었다. 하나는 정말 빠르게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명한 러시아의 도시와 이름도 생소한 나라들을 지나 많이 돌아서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빨리 러시아를 벗어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민스크를 경유해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비자에 문제가 있었다. 벨라루스는 우리나라와 비자 면제 협정을 맺고 있지 않아서 돈을 내고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비자를 신청할 때 정확한 입국일자와 출국일자를 제시해야 했다. 벨라루스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시점은 정할 수 있었지만 여행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오는 시점은 정할 수 없었다. 아직 4 개월 동안 어떤 경로로 움직일지도 못 정한 상태였다. 일정이 다 정해질 때까지 비자 신청을 마냥 미룰 수도 없어서 결국 민스크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서 가기로 했다. 러시아와 EU 소속 국가들은 우리나라와 비자 면제 협정을 맺고 있었다. 발트 3 국 국가들도 EU 회원국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서 가면 따로 비자 신청을 할 필요가 없었다. 돌아서 가는 것이라 최소한 며칠은 더 걸리겠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발트 3국도 가보고 싶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보고 싶었는데, 레닌그라드로 불리기도 했던 역사적인 도시라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생겼다.
일단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서 가기로 하고 도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봤다. 뭐가 유명한지, 어디를 가봐야 하는지를 찾아봤는데 알면 알수록 그냥 지나치기에 아까운 곳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하루도 안 쉬고 달려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며칠 쉬었다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묶게 되면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고 싶었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더불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장에서 발레를 관람하는 것만큼 짧은 시간에 러시아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지만 진짜로 러시아에 간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발레 표를 살 수 있을까, 자리가 남아 있을까,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발레를 거기에서 봐야겠다고 하는 건 허세가 아닌가, 이것저것 고민하다 마린스키 극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인터넷을 통해서도 표를 예매할 수 있었다. 다만 일 년 내내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초여름까지만 공연이 있었고 좋은 자리는 이미 예약돼 있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고 싶다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며칠 동안 온라인 예매 과정의 좌석 선택 단계에서 빈 좌석이 얼마나 되는지만 확인하다 마침내 신용카드로 결제까지 해버렸다. 4월 26일 수요일 저녁 7시 공연이었다. 자리는 1층 한가운데에 있는 무대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한 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만 루블, 우리나라 돈으로 20 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지불했다. 훨씬 싼 자리들도 있었지만 평생에 한 번이 될 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보고 싶었다. 이제 20 만원을 날리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4월 26일 수요일 전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야 했다. 기차표부터 예매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