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미술관을 다녀온 날 저녁 새로운 게스트들이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온 두 명의 여자들이었다. 터키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런던에서 온 사람들이 묵게 될 거라고 하는 걸 듣고 내심 반가워했었다. 바로 다음 주에 런던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얘기도 나눠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내가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그중 한 여자와 거실에서 마주쳐서 “Hi” 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녀는 “Hi”라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성의 없게 인사를 받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고 여자들 둘이 할아버지랑 무슨 얘기를 하는데 분위기가 안 좋아 보였다. 자기들만 쓰는 거 아니었냐고, 저 사람은 누구냐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내가 할아버지에게 알려준 영어 이름인 ‘Den’,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만난 러시아인 동행이 지어준 이름을 불러가면서 킬킬거렸다. 자기들 방으로 들어간 여자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는데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같이 지내게 된 게 싫을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날 무례한 동양인으로 보고 그러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들이 있는 동안은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여행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Den’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 내 한국 이름 세 글자를 한국식으로 성부터 말한 후에 발음이 어려우면 가운데 글자 하나로 부르라고 했다. 성은 너무 상투적이었고,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에는 'ㄴ' 받침이 있어서 마지막 글자만 발음하면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중국인 이름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