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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ug 29. 2023

남편사용설명서

커피를 독립시켰다.

아침 6시쯤이면 깨어나 글을 쓰거나 올라온 글들을 읽습니다. 오늘은 글을 써야 하는데 읽기에 빠져 글쓰기를 좀 늦게 시작했지 뭐예요. 늦은 만큼 부지런히 마무리에 들어가려는데 옆에서 난리입니다. "아침 안 줄 거야!" 어휴 그 넘에 아침, 점심. 저녁(속으로) 하면서도 후딱 일어나 야채과일샐러드와. 수프. 빵, 우유를 아침상에 올렸습니다. 고요가 남아있는 이 아침 글쓰기 필 받아 아내분이 바쁘신데 아침상 차려보라 해볼까나.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차릴양반도 아니지만 만약 한다 해도 카이피라(유럽형 상추로 아삭하고 무농약 수경재배라 안심하고 먹고 있음) 어디 있어? 아, 그거 스탠드냉장고 서랍위칸에 있어요, 파프리카랑 브로콜리는? 아, 그건 일반냉장고 두 번째 칸 통에 있어요. 그럼 토마토는, 블루베리는, 아몬드는, 삶은 계란은,.... 냉장고 속을 모르니 물어보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거 다 읊어대느니 내가 먼저 포기하고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뿐이면 다행이게요. 왜 이건 여기에 지저분하게 쌓아두었느냐, 이건 언제 적 음식이냐. 급기야는 내가 살림하면 이렇게 안 한다 까지 갈게 뻔하니 애초에 바라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번에 커피를 독립시켰다 아닙니까. 이 일은 대단한 일입니다. 모두 코로나19 덕분입니다. 찰떡부부까지는 아니건만 부부가 나란히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밤을 꼴딱 새우고, 독한 약을 먹다 보니 당연 커피를 달라하지도 않고 타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원래 루틴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가 끝나면 의례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스한 커피를 대령하고, 저녁에도 설거지가 끝나면 얼음 동동 아이스커피를 턱밑까지 가져다 바쳤는데 몇십 년을 하던 그 일을 이번에 바꾸었다 아닙니까. 3~4일 정도 아프고 나니 아침에 수저를 놓는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아니 같이 아팠는데 누구는 죽어라 삼시세끼 차리고 누구는 편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고 은근 부아가 치밀더라고요.


그래서 한마디 했지요. '힘들어 죽겠는데 진짜 숟가락 몽뎅이 하나 안 놔주고 해도 해도 너무 하네요.' 그러면서 수저를 식탁에 탁! 탁! 거칠게 놓았더랬지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아침을 먹더니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쩌겠어요. 청소포로 바닥을 닦고 정리를 했지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밥을 먹고는 "커피 안 줘!" 합니다. 못 들은 척했습니다. 이참에 끊어버릴 작정이었습니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용기가 생긴 걸까요. ㅎ


요즘 새 차를 뽑느라 며칠 바빴습니다. 타던 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등록하느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서류도 필요해서 동사무소에 다녀오더니 더운지 냉커피를 타줬으면 하네요. 안 타줄까 하다가 시원하게 얼음을 가득 담아 타주면서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번에는 타주겠지만 이참에 "커피독립시킨 거예요."라고 말입니다. 이게 뭔 소린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이번에 아프면서 생각했는데 당신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할거 같아요.( 와아~ 드디어 해냈어 빠샤!)'




문제는 자꾸 설거지가 끝나면 커피를 타다 주고 싶은 거였어요. 습관이 무섭습니다. 아니지 하며 어떻게 쟁취한 일인데 밀고 나가야지 괜스레 아일랜드 식탁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커피 한잔 가지고 이리 쫄깃해할 일인가요. 어쨌든 아직까지 별 항의 없이 알아서 타다 먹는 것 같아요. 단지 얼음을 먹고 물을 채워놓아야 하는데 빈 얼음통이네요. 그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거 채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퇴직을 하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변함없이 아니 전보다 더 대접을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와이프가 삼시세끼 밥도 모자라 간식까지 챙겨주고 아무것도 안 하고 탱자탱자 놀아도 눈치 주지 않으니 그보다 더 편한 황제놀이가 있을까요. 하지만 같이 움직여할 일들이 많다 보니 별수 없이 빨래도 널어주고, 청소기도 밀어주고, 집안에 자잘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에 폭풍칭찬과 감사의 말도 얹어졌고요.


거기에 커피까지 독립시켰으니 이제 뭘 하나 더 얹어볼까요. 가장 잘하는 것이 하필 안 좋아하는 라면 끓이기 인지라 마땅한 것이 없네요. 조금은 먹기 싫어도 가끔 꿇여달라 해야겠어요. 하늘 같으신 낭군님께서 여주신다는데 뭔들 마다하겠어요. 이번 주말에는 맛있는 라면으로 고고고~~~

사용법 : 하나씩 천천히 물들이기.

AS : 완전 지났음(불가)

유통기한 :  먼저 가는 사람이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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