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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pr 26. 2023

아름다웠던 그 날들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나의 모교

학교 가는 길


봄비가 내리고 나면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연초록 잎들이 줄지어 피어난다. 싱그러운 봄내음이 가득한 신작로길을 따라 어린 걸음으로 1시간이나 걸리는 학교길이지만 언제나 즐거웠다. 신작로길이 끝나면 작은 공동묘지길을 가로질러야 한다. 봄이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따사로운 봄볕을 찾아 여기저기 즐비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똬리를 튼 징그러운 뱀들을 들이대면 죽어라 달려야 했다. 아침부터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아침이슬이 흘리고 간 시원한 봄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4월에 푸르른 보리밭이 우리를 맞이한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보드라 보리순 위에 작은 손을 얹으면 내손도 푸른빛으로 물이 들 것만 같았다. 그 생각도 잠시 어린 내가 오르기에는 버거운 언덕길이 나타난다. 결국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작은 산을 넘어야 했다. 그렇게 헐떡이며 산 정상을 넘어서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난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그제야 저 멀리  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실 구석에 처박혀, 가난한 소녀가 어느 날 부잣집 부모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순간 정신 차리고 둘러보다 친구들이 모두 가버리고, 이 넓은 학교에 나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헐레벌떡 헉헉거리며 달려간 그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언덕길을 숨죽여 오르기 시작했다. 저 진달래꽃 밭에는 *문둥이가 산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을 따 먹는 문둥이에게 들킬까 봐 무서워 조심조심 발소리 죽이며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책 속에 그 가난한 소녀가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 문둥이(그 당시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한센병환자를 두고 난 소문으로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모습에 아이들이 놀랄까 봐 조심하라는 측면에서 그랬거나, 산이다 보니 혹여 뱀이라도 있을까 봐 염려되어 그랬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운동회


이제 그 커다랗고 넓기만 했던 운동장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을운동회가 열리던 날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온 동네 사람들이 총출동한 축제의 날이다. 나는 6학년 국민학교 마지막 운동회 청백계주에서 청팀의 마지막 주자였다. 이를 악물고 달리고 달려 마지막 결승점에서 첫 번째로 하얀 줄을 가르던 그 순간,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던 그날에 함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마을대항전에서는 스타트가 주특기인 나의 활약으로 우리 마을이 1등을 하는데 일조를  했다. 엄마는 그날도 가을들판에서 일하시느라 오시지 못했다. 그날만큼엄마가 새벽부터 싸주신 도시락을 챙겨 들고 오신 할머니께, 어깨가 한 뼘쯤은 올라갈 만큼 자랑스러운 손녀딸이었다. 할머니 손에는 반에서 1등으로 받은 상품과 청백계주에서, 마을대항전에서 받은 상품들로 두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마을어르신들께서는 그런 손녀딸을 둔 할머니를 부러워했고.  달려줘서 고맙고 기특하다며 정성스럽게 싸 오신 먹거리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국민학교 마지막 운동회를 승리로 장식한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여전히 고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플라타너스가 춤을 추던 교정에서 족두리 쓰고 부채춤을 추던 그 모습 역시 아직도 선하다. 그런데 이제 그 학교가 문을 닫고 인근 신도시로 교명만 가지고 옮긴다니 아쉽고 그 교정이 더욱 그리워질 것만 같다.


젊은이를 찾기 어려운 시골에서 학령인구는 점차 줄어만 가고, 한때는 학생수가 많아 여기저기 늘어났던 분교가 하나, 사라져 갔다. 결국 본교마저 옮기게 되었다니 나의 추억도 사라지는  같아 아쉽기만 하다. 한글을 한 자 한 자 배우면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알아가고, 동화책 속 이야기들을 따라 허무맹랑한 꿈을 꾸던 순수했던 그 시절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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