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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pr 25. 2023

어린 날의 풍경

그때는 그랬어요.

훠이~ 훠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요넘에 참새가 들은 척도 안 한다. 내가 어리다고 얕보는 건가? 깡 마르고 가무잡잡한 긴 머리 어린아이가 이른 새벽부터 밭고랑에 앉아 있다. 막 새싹이 되어 올라오는 무, 배추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새벽바람이 차가운 도 너무 일찍 일어나서인지 자꾸만 눈꺼풀은 내려앉는데, 참새들은 아랑곳없이 아침을 해결하려고 야속하게 쉼 없이 달려든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막으려고 결국에는 고픈 배를 부여잡고 밭고랑을 뛰어다녔다.


부모님은 오빠 남동생들에게는 일을 시키셨지만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자아이인 내게는 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참새를 쫒는 이 일만큼은 제외시키지 않으셨다. 분명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시키셨을 텐데도 너무 졸리고 힘에 부쳤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참새들이 배를 채웠는지, 포기했는지, 더 이상 달려들지 않는 시간이 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댓바람부터 진을 뺐으니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밥이래야 흰쌀을 찾아보기 어려운 거친 보리밥에 입 짧은 어린아이가 먹을 만한 반찬이 있을 리 없다. 깨작이다 수저를 내려놓고 그래도 학교를 가겠다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책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집을 나서곤 했다.




5남매 중에 언니, 오빠 그리고 나,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는 딱 가운데 관심받을 길 없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언니는 언제나 집안의 든든한 살림밑천으로 사랑받았고, 오빠는 이 집의 장남으로 내게는 복종의 대상이었다. 다행히 남동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누나말에는 토 달지 않고 잘 들어주는 착한 동생들이다.


엄마는 방학만 되면 나를 외갓집으로 보내셨다. 살림형편이 좀 나았던 외갓집에서 외사촌 언니들과 놀았지만 부모형제가 없는 그곳이 늘 외롭고 어려웠고 불편했다. 하지만 차마 외갓집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입하나라도 덜어내려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중학교에 가면서 그 달갑지 않았던 외가행끝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모르실 거다. 내가 얼마나 눈치를 보며 힘들어했는지.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 없었던 내가 어떤 일로 꾸중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은 너무 슬펐다. 내가 이 집에선 쓸모없는 자식이고 없어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는 깜찍한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서 눈물을 질질 흘리며 닭장으로 쓰였던 작은 헛간구석 짚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헛간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낮에 햇살 때문인지 울고 나서 인지 잠이 솔솔 밀려왔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보니 그 헛간에도 어둠이 내려와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애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식구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팔방 없어진 애를 찾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웅크리고 불편한 자세로 낮잠에 빠져들었던 나는 저린 발을 펴며 검불범벅인 옷을 털어내고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컴컴하고 무서운 그 헛간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가니 등잔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안에서는 밥그릇에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와 밥냄새가 진동했다. 눈치 없게도 뱃속에서는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어여 밥 먹어!"

하며 엄마는 내 앞에 수저를 돌려놓으셨다. 

그렇게 어린 날 나 혼자만의 한나절 가출(?)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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