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아직도 혼돈되는 대한민국 입국 20년
2002년 3월 14일 나는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공항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대한민국 만세”를 웨친건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북한을 떠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을 옥죄이던 북송의 공포를 이제 더 이상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몇백 배 더 컸다.
그래서 기뻤고 설레었고.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마음에 담았다.
2002년 입국당시 2020년 현재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서의 20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제는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손사래를 칠 만큼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니 아마 강산이 4~5번쯤은 변한 듯하고 그 4~5번이 바로 내 삶의 변화인 거라 생각된다.
격변의 20년이라고 해야 할지, 안정된 삶으로 가는 20년이라고 해야 할지.
흘러간 20년의 시간들은 정말 빠르게 지난 듯 하지만 그 분초를 따져보면 참 많은 것들이 변해 있다.
파릇파릇 30대에서 할머니 소리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50대가 되어있다.
그 20년
무엇을 해야 할까의 고민으로 시작했고
어떤 것이 행복할까의 미래를 꿈꾸었고.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하는 허무함에
삶의 막바지에서 생과 죽음의 경계도 넘나들었다.
그렇게 20년을 돌아보니 아직은 살아있구나 싶다. 내가.
그 20년
다섯 명의 대통령에 투표했다.
그리고 그 대통령으로 나의 삶이 희망적이길 간절히 바랬다.
되돌이로 반복되는 이 간절함은 과연 해소될 수 있을까?
그 20년
나는 30대 후반에 한의대에 입학했고
40대 초,중반에 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한의사가 되어있고
주변 상황에 기웃거리거나 휘둘리지 않으려고 나는 여전히 1.5평의 작은 진료실을 고집하고 있다.
2004년 2009년 2020년
그 20년
나는 내 삶의 전부인 아들을 헤어지고 14년 만에 한국으로 데려왔다.
가족은 살아가는 이유이고 삶의 안정의 의미이기도 한다.
그 20년
참을 수 없는 유혹들도 있었다.(참을 수 없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저를요?
내가 감히?
아니, 왜 나를?
당황했고 의아했지만 고마움과 감사함이 컸다.
그래서 그 유혹에 흔들렸다. 아주 많이.
남들이 그렇게 잡고 싶어하는 유혹의 끈을 잡고
잠깐이나마 유혹에 흔들려
고맙고도 황송한 제안 속의 나를 흐뭇하게 그려보며 어깨에 힘을 한번 줘보기도 했지만
그 유혹에 갈갈이 찢기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아 한 번쯤? 하는, 다 드러낼 수 없은 욕망과 이성 사이의 고민,
정중히 반려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돌아보건대, 내 인생 최고의 고민이었지 않을까?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반려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의 준비도, 실질적인 능력도 없는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반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희망을 가지고 왔다가 원망과 안타까움과 속상함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나의 주변의 나를 쳐다봐주고, 따뜻이 미소 지어주고, 용기 내라고 손잡아 주셨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그 20년에 나는 의학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그 20년에 나는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 20년의 종점에서 지금 법학 박사과정의 5학기로 마침표를 찍을 마지막 코너를 돌고 있다.
그리고 다음 20년의 시작을 대학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앞으로 20년
또 무엇이 내 삶에 희열을 불어넣을까.
당면하게는 법학박사 논문일 듯하고
강단에서의 20대와의 만남일 듯하고
환자들과 직원들과의 여전한 돈독함일 듯하다
50대 중반.
나는 여전히 건강하다.
나는 여전히 열정적이다.
나는 여전히 즐거움을 꿈꾼다.
나는 여전히 도전을 꿈꾼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한다.
미래의 나의 20년을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