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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Dec 09. 2022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비법 세 가지(3)

-호흡 바라보기와 요가


해변에서 햇살을 받으며 요가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위 짤의 갈라파고스 바다사자는,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아주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닷가에서 따스한 빛무리가 콧잔등에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바람을 만끽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요가 수련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불행히도(?) 나는 요가를 하면서 바다사자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평안은 느낀 적이 거의 없다. 

너무 힘들어서 머릿속이 하얘지는 바람에 세상 그 무엇에도 초연 해지는 류의 평안은 자주 느껴 봤지만.


내가 수련하고 있는 아쉬탕가 요가는 난이도 있는 동작이 주를 이루는 덕인지 초보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요가 스타일로 꽤 많이 알려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호기심에 덥석 시작한 나는 '요가란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보다.'하고 묵묵히 난이도 있는 동작들을 수련했다. 요가를 하면서, 특히 난이도 있는 동작들을 수련하면서 느낀 점은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고스란히 동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수면의 질, 전날 먹은 음식 그리고 생리 주기와 배란 등에 의해 동작의 완성도가 달라졌다. 생리 전에는 예외 없이 복부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전날 고기나 술과 같이 무거운 음식을 먹은 날이면 뱃속이 무거워 비틀기가 평소보다 잘 되지 않았다. 


마음 상태도 아사나(요가 동작을 이르는 말)에 영향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악을 써서라도 동작을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면 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진이 빠질 뿐 아사나의 완성도는 애쓴 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 반대로 마음을 내려놓고 호흡과 동작의 일치에만 집중하면 평소에 되지 않던 동작이 어이가 없을 만큼 쉽게 되기도 했다. 이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평소 먹는 음식과 바이오리듬에 따라 같은 동작도 매일 천차만별로 다르게 느껴졌다. 나에게 요가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는 바로미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인간은 사회화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억압하게 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지나치다는 느낌도 있다. 국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특성상 나라 주도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이라는 생물 본연의 행복한 삶보다는 효율성에 입각해 개개인의 몸을 통제하는 뱡향으로 교육이 이뤄지는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몸을 단련하는 것이 곧 마음의 힘을 키우는 길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자명한 일이다. 타고나길 신경이 예민한 데다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과도하게 남의 시선을 신경 썼던 나에게 있어서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힘든 아쉬탕가 요가 수련은 특효약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거봐, 마음이 힘들다는 건 몸이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라니까. 여유가 있으니까 마음이 힘들다는 소리도 하지."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단순히 힘든 일(혹은 운동)을 해서 몸이 힘든 것과 내 몸과 호흡을 의식하며 움직임을 행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같은 동작을 그날그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매일 다르게 체험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고,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 받아들이자.' 하며 자신을 믿고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갑작스러운 신변의 변화가 생긴 탓인지 평소 잘 되던 아사나가 되지 않았다. 

처음 진도를 받았던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거의 실패하는 일이 없었던 머리서기 동작에서 방심하다 굴러 떨어지고야 말았다. 


살람바 시르사아사나 일명 물구나무서기 혹은 머리서기자세. 저걸 하다가 보기 좋게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몇 년 전 처음 시르사아사나 진도를 받고 수련하던 시절 워낙 사방으로 자주 굴러 떨어졌던 탓에 큰 타격은 없었다. 한창 굴러 떨어지던 시절에는 낙법(?)도 익혔던 몸인지라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제 어느 정도 '마스터'했다고 여겼던 아사나에서조차 실패할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의 패인은 유난히도 복부에 힘이 잡히지 않는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급하게 다리를 차 올렸던 탓이었다. 동작을 얼른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몸이 주는 메시지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시원하게 앞으로 구른 덕에 오늘도 요가로부터 한 수 배운 셈이다. 






호흡과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실제로 뇌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숙련된 명상가들의 뇌에서는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피질의 활동은 감소한 반면에 신체 감각을 느끼는 섬엽의 활동이 증가하고 집중력을 조절해 주는 전방 대상회의 활동이 증가하였다(『이제 몸을 챙깁니다』, p.218)는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해 준다.  


비단 요가뿐만 아니라 신체 감각을 지각하는 섬엽의 기능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움직임이라면 무엇이든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춤을 추는 것이 인지 기능 향상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나는 이미 요가를 하고 있기에 춤은 따로 배우지 않고 집에서 혼자 '막' 춘다. 정적인 요가와 달리 막춤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든 움직임의 총합이므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내 몸의 가동범위와 인지 능력을 키우고 유지하기에 좋다. 요가와는 다른 의미로 릴랙스(relax)할 수 있음은 덤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결국 신체 활동이다. 몸과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몸뚱이를 지니고 몇십 년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이 몸을 당연하게 여기는 때가 온다. 어릴 적 가졌던 몸에 대한 호기심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몸을 머리의 하수인처럼 다루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머리와 몸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바라보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 몸의 감각을 느끼고 인식할 때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타인에게로 향하는 판단의 잣대도 거두게 된다. 내게는 요가가 몸 바라보기를 연습하는 도구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만만치 않고, 따뜻한 이불과 옆에 누운 강아지 몸에서 나는 달큰한 냄새가 얼른 알람 따위 꺼 버리고 누워 있으라고 유혹하는 데도 애써 몸을 일으키는 이유는 오로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몸을 인식하지 않아 머리만 잔뜩 무거운 채 사는 삶이 얼마나 지복(至福-더없는 행복)과 거리가 먼지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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